교장 선생님께
교장 선생님께
‘아이엠에프 사태’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이 아주 큽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격동이었다고 하더군요. 부도가 나서 망하고, 쓰러지고, 자르고 잘리던 상황
이 예사로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긍정적인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
다. 예를 들어 전직 대그룹 과장이 구두닦이로 나서고, 전직 은행 간부가 해장국
집을 차리는 상황을 우리 사회에서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그 전에는 직
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도, 속내로는 귀천을 따졌거든요.
아이엠에프 사태 전에는 육군 대령으로 제대한 사람이 통닭집을 할 수 없었어
요. 본인이 용기를 내어 체면을 생각지 않고 시작한다고 해도, 가족과 친구, 친
척들이 영관 장교 출신이 그런 것을 해야겠냐고 뜯어말렸습니다. 회사원들은 평
생 직장이라고 해서 전직을 아예 생각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같은 직종 다른 회
사로 옮길 뿐이었지요. 어떤 때는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조차 마치 조직이라도
배신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에서야 우리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을 믿
고, 사람이 살면서 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지금 많은 사
람들이 직장을 옮기거나 전직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모
든 편견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이해하고 사는 셈입
니다.
교사는 아이엠에프 사태 이전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던 분
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사는 당연히 존경받을 사람으로 믿었으니까요. 그 중
에서도 학교장은 교사로 한평생을 보내고 지금은 많은 교사를 관리하는 사람이
니, 더욱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학교장은 다른 일반인보다 우리 사회 변화를 더 빨리 이해하고, 말과 행
동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줄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엠에
프 사태가 무슨 일이고, 왜 그런 상황이 닥쳤으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고, 앞
으로 어떻게 해야 바로 사는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더구
나 학교장이 봉급 생활자로 ‘철밥통’을 차고 아이엠에프 사태에서 한 걸음 떨어
져 있었다면, 우리 사회 위기를 온몸으로 막다가 희생된 분들에게 어떤 식으로
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요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학교장이 사회 변화를
선도하기는커녕 변화를 제대로 이해조차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
다. 자기 마음대로 하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정상적으로 바뀌는 질서를 거부합니
다. 아직도 편견과 선입관과 습관에 갇혀 ‘굶어 죽어도 육군 대령 제대자는 통닭
집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학부모들이 아이를 맡겨 놓은 죄로 굽신대고 존경하는 척하고 있다는 사
실을 모르고, 자기가 하는 말이 항상 진실인 줄 알며, 자기가 굉장히 잘난 것으
로 착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요즘 학부모들이 정말 존경받을 학교장만을 존
경하지, 단지 학교장이라는 사실로 무조건 존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고서 교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 모든 인연들이 너무나 쉽게 끊어지면 세
상 인심과 상대방을 탓합니다.
그러니 교장선생님!
‘내가 젊었을 때는 굉장히 성실했으며,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학부모한
테 존경받았지.’라고 생각하시면, 요즘 젊은 교사도 교장 선생님 젊은 시절 못
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말 많은 학부모가 사실은 학교
를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는 반려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학생과 학부모가 직업과 학력과 빈부에 상관없이 학교에서 자유로이 말하고 당당
히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