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꾸기

제 목
이름 바꾸기
작성일
2003-08-13
작성자

우리 나라에서는 이름 값이 큰 편입니다. 누구네집 자식이라거나, 어느 집안 자
손이라는 말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선진국에서는
대통령 딸이 마약을 복용하다가 걸리고, 수상 동생이 평범한 직장조차 얻지 못
해 실업자로 지내도 국민들이 그러려니 받아들이지요.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누
구네집 누가 저럴 수 있냐는 식으로 하나로 묶어 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사람도 그런 나라
에 가서 살게 되면 사무실 청소, 막노동 같은 궂은 일을 합니다. 어느 대학과 어
느 직장이 한국에서나 통하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제의 나를 버리
고 내일을 보며 새롭게 사는 셈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훌 떠나고 싶습니다. 오
늘날 겪는 삶이 번잡하고 힘들수록 더더욱 지금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막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이름이 ‘김희선’이고 ‘장동건’이라면, 또는 내가 누구누구의
배우자가 아니라면 사는 방식이 달라질 거라고 믿지요.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기가 쉽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로 남편이
라는 이름, 아내라는 이름을 바꿀 수도 없지요. 그래서 현실이 힘든 사람일수록
자기를 둘러싼 현실에서나마 조금 비껴난 곳으로 탈출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를 모르는 낯선 관광지에서 술 한 잔에 망가지기도 하고, 자기를 모르는 낯
선 이성과 연애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으면 포장마차에서 마신 술기운
을 빌려 자신을 스스로 낯선 사람으로 만들고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합니다. 그
리고 대부분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후회하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탈출을 꿈꾸면서도 이민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놓인 현실을 바꾸어 새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따지고보면 이민이 아니더
라도 직장을 바꾸거나 이사를 하는 것도 주어진 현실이 바뀌어 새로이 출발하는
셈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혼과 재혼도 새출발이군요. 술담배를 끊거나 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세례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도 새로이 의미
를 덧보태는 셈이지요. 물론 즐겨입던 옷을 바꾸고 머리를 확 쳐내는 것도 조그
만 새 출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