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행기 5 – 마피아와 보드카를 마시다…
6월 13일, 우리 일행은 말쑥하게 차려 입고 이르쿠츠크 공대를 공식으로 방문하
였습니다. 우리쪽 단체인 “열린사회아카데미”와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
다…. 부총장님 두 분, 국제교류처장, 동양학부장님이 직접 맞아주시고 우리 일
행이 궁금해하는 점을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서 여러 모로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에서 제
대로 지원하지 않는데,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이런 과도기에 어떻게 학교를 꾸려
갈지, 어떻게 학생을 가르칠지,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 어느 인문대 책임자들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지
금까지 우리 나라 인문학과 교수들이 돈과는 멀었지요… 긍지로 살았다고 할
까? 명예로웠다고 할까? 그런데 오늘날 그런 자긍심을 누가 알아주지 않지요…
돈 없으면 교수도 한낱 거지일 뿐이니까요… 말하자면 러시아 대학 교수들은 지
금까지 먹고사는 걱정없이 한 평생 한 학문에 매달릴 수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
기 세상이 바뀌더니 정부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각자 해결하라고 하니 황당
해 하는 겁니다….
지금 러시아 최고 인기학과가 경영학과라고 하네요…. 은행원이 인기 직업인이
구요… 자본주의를 잘 알기 때문에 자본주의 나라와 장사할 때 그 사람들이 있
어야 하지요…. 우리 나라는 주로 젊은 벤처 기업인이 부자가 되는데, 러시아에
서는 경영학과 출신이 부자가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우리
가 궁금해 하는 것을 그분들이 귀 기울여 듣고, 성심껏 대답해 주셨습니다… 대
화를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학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에는 우리와 용모가 비슷한 학생
이 많았는데, 대부분 중국 학생, 몽고 학생입니다…. 어느 나라나 대학은 젊은
이들이 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 나라 대학에 가본
적이 없어 다른 분들에게 물었더니, 우리 나라 대학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고 합니다… 빵과 음료수, 샐러드가 있는 점심은 먹을만 했는데, 한 끼 1000원
쯤 한다고 하니, 아주 비싼 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학 교수들은 대개 도시
락을 싸온다고 하네요… 하루 한 끼 한 달 2만 5천원이면 교수 월급 절반에 해
당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러시아에서도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
은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뜻이지요…
광물 박물관은 이르쿠츠크 공대에서 자랑하는 박물관입니다… 러시아에 없는 지
하자원이 없다 할 정도로 천연 자원이 풍부합니다… 광물학과는 그런 자연을 배
경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학과입니다… 사진에 있는 분은 우리에게 박물관 이곳
저곳을 소개한 박물관장님인데, 박물관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학식도 풍부
한 분입니다…. 한국에서 온 낯선 이에게 그 많은 광물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데, 하루 종일 안내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정열을 지녔지요… 오른
쪽 사진은 어떤 광석을 자른 면인데, 마치 어느 현대 화가가 추상화를 그려 놓
은 듯 합니다…
한 강의실에서 동양학부 학생들과 만났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 몽고학과 학생
들인데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 열 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한국어 교수는
두 분.. 그 중 한 분은 한국에서 간 김 교수님인데, 젊은 여교수로 미혼입니다
(왼쪽 사진에서 제일 오른쪽 검은 옷을 입은 분).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자
부심이 아주 커서 한국어 불모지인 이르쿠츠크에 어떻게 해서든 한국어를 자리
잡게 하려는 노력이 대단하였습니다… 오늘 행사에 모두 참여하여 여러 사람 이
야기를 통역한 분도 이 분이었지요… 어떻게 해서라도 뭐든 보내주고 싶더군
요… 텅빈 한국 문화관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좀더 궁리해 보아야겠어요… 동
양학부 학생들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국 대중가요를 불렀습니다.. 그 자리
에서 토론도 벌였는데, 저는 일본인 교수와 영어로 대화하였습니다… 그 일본
인 여교수는 일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지요… 서양 문화가 밀려올
때 동양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일본은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저녁 식사는 부총장님, 동양학부장님, 국제교류처장님 등이 학교 안에 차려 주셨
습니다.. 우리를 대접하려고 정성을 담아 차려 내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
다… 보드카도 먹고, 연어알을 바른 빵도 먹고, 더운 여름날 더위를 가시려고
먹는다는 발효유에 탄 전통 음식도 먹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한참 먹다가 한
분이 일어나 한 마디를 하시고 건배를 제창하여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물론
술을 먹는 남자는 잔을 꼭 비워야 합니다…. 그러다 또 한참 있다가 손님 중에
어느 분이 일어나 한 말씀하시고 건배를 제창합니다….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합
니다.. 세 번째 분은 여성을 위해 건배를 한다고 합니다… 좋은 문화인 것 같습
니다… 중간중간 분위기를 가다듬고 화제를 한 군데로 모으는 지혜라고나 할까?
대학 기숙사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외국인 전용 기숙사로 가장 좋
은 기숙사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 시설이 풍요롭지 않지요… 그래도 이 기숙사
를 쓰는 사람이 적어, 비어 있는 방이 많았습니다… 그 빈 방을 우리가 잠시 쓰
고 있는 셈이지요… 새벽 1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한 밤중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배웅하러 나온 국제교류처장님이 이별을 슬퍼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렇지요… 바이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날도 많다
고 하던데, 우리는 한 번도 날씨로 속을 썩어 본 적이 없었지요… 그저 그런 날
씨가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요…. 러시아 날씨가 우리와 함께 다닌 셈이지요.
잘있어라… 이루크츠크… 바이칼이여… 우리들 중 누군가 “내가 내 생애에 바
이칼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래… 나도 살아서 바이칼을
또 볼 날이 있을까… 울컥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정든 고향을 두고 떠나는 사
람처럼 러시아와 시베리아, 바이칼은 어느 새 우리들 가슴에 들어와 있었던 거지
요…
이루크츠크 공항에서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러시아 국내선은 좌
석 번호가 없어 아무 자리에 앉아야 했지요…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옆 자리에 가방을 놔두고 못 앉게 하더군요… 편하게 가겠다는
속셈이지요. 어쩌다 보니 저는 험악한 두 마피아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미 술에 잔뜩 취해 있는 마피아 1은 나에게 보드카를 꺼내 건네주고 전혀 한 마
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댔습니다…. 얼굴에 흉터가 죽죽, 배는 영
화 “대부”에 나오는 갱마냥 불룩… 안 마시면 죽일 것 같아 마셨습니다. 그러
자 마피아 2가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냈습니다… 아니, 이거 뭔 수작이
야…. 올 것이 왔구나… 그런데 마피아 2는 비닐에 싼 것을 풀어 소금에 잔뜩
절인 돼지 비계를 꺼내더니, 주머니칼로 쓸어서 내게 술안주로 주었습니다….
그렇게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보드카 한 병을 다 먹자, 둘다 곯아 떨어졌지
요…. 휴…. 다행이다…. 식은 땀을 닦았습니다…. ^^;
그래서 이번에는 앞 자리에 앉아 있는 군인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군인 1은 헬
리콥터 조종사, 나이는 27세… 군인 2는 헬리콥터 기총수… 나이 비슷…. 우
리 나라 군인처럼 순진했습니다… 예를 들어 군인 2는 가슴에 있는 휘장을 자랑
하였습니다… 휘장을 사진을 찍으려고 하였더니 못 찍게 하였습니다… 비밀이
랍니다… 그러나 나와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을 때 다 찍혔습니다…. ㅎㅎㅎㅎ
군인 1은 헬리콥터 조종사인데, 군인 2에게 열등감이 있었는지 화장실에 가자고
하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같이 피면서 주머니에 있는 작은 훈장을 꺼내 보여주었
습니다…. 비행기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할 때까지 화장실에 가서 그 훈장을 여
러 번 봐야 했습니다….. ^^; 그래도 이 사람이 비행기 안에서 비싼 보드카를
사서 저와 같이 마신, 고마운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 화장실 앞에서 만난 아저씨… 그 분이 들고 있는 담배는 “표토
르 1″이라는 러시아 담배였습니다… 500원쯤 하지요… 아주 순합니다…. 제
가 들고 있는 일제 “마일드 세븐”과 바꾸자고 했어요…. 2500원쯤 주고 산 거지
요…. 어리둥절하더니 바꾸대요…. 그런데 이 분 때문에 하바로프스크에 도착
할 때까지 담배를 피웠습니다…. 담배를 피러 갈 때마다 담배를 주셨기 때문입
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물었지요… 여보, 나 잘 했지? 그 사람 무지하게 좋
아했을 거야… 아냐, 그 러시아 사람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이거
바보 아냐?” “………”
옛날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해방 직후 평양에 사셨던 우리 아버님이 제게 말씀
해 주셨어요… 해방 후 소련 군인들이 북한에 들어와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한테
서 시계를 빼앗아 팔뚝에 죽 차고 다녔대요… 시계 태엽을 감아 주어야 시계가
안 죽는데, 시계 밥을 줄줄 몰라서 시계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련 군인이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죽은 시계를 끌러 주면서, 산 시계와 바꾸자고 했어요.
이 사람이야 총을 든 군인한테 그냥이라도 줄 판인데, 바꾸자니 그러마 하고 얼
른 끌러주고 집에 돌아왔답니다…. 물론 바꾼 그 시계는 태엽을 감아 주니까
잘 가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시계가 엄청나게 비싼 금딱지 시계더라는 거
지요…. 내가 그 소련 군인 짝 났어요…. 바봉…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