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큰 그릇인 줄 아는 교장 (1999년 7월에 쓴 글)

올 8월에 학교를 떠나는 분들이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난 해 정부에서 교
원 정년을 62세로 단축하고, 또 개별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학교를 떠나는 분들이 대부분 관리직인 것을 고려하면, 지난 날 전교조
교사 1천 몇백 명을 해직하여 온 나라가 시끄럽던 때와 비교할 때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조용하다.

어떤 교육학자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관리직이 그렇게 많이 빠져나가도 학부모들이 답답해하지 않는 것은 그 동안
학교장이 학부모한테 신뢰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학교운영
위 제도를 만들고 앞으로는 학부모, 지역 사회와 상의하여 학교를 꾸려나가라고
했을 때, 학교장들은 대부분 학교운영위 제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
니라 틈만 나면 무력화하려고 하였다.
학교가 교육적 양심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줄 알았던 학부모들이 학교운영위에
참여하고 학교 실상을 들여다보면서 학교가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비교육적으로
돌아가는지를 깨달았다. 특히 관리자들의 독선과 고집 때문에 많은 학부모, 학
생, 교사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교원 정년을 대폭 줄이자고 주장했
다. 말하자면 그때 학교장이 학교 일을 학부모들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더라면 학
부모들이 앞장서서 학교에 원로 교사가 필요하다고 정년 단축을 반대하였을 것이
다.”

일리 있는 분석이다. 교사의 고질적인 직업병이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버릇이
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을 모두 진실로 착각하고 마치 자기가 공자나 되는 것
처럼 우쭐대기 쉽다. 주변에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가 있어 이런 부분을 일깨워
주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할 때는 고개 숙이고 남을 포용하기는커녕 나이 들수
록 자기 잘난 맛에 빠져 살기 쉽다.

그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뭐든지 혼자, 외로이 결단하기를 좋아한다. 무슨
일을 상의한답시고 못난 교장들이나 일을 질질 끌고 효율 떨어지는 짓을 한다고
믿는다. 학부모들에게 빈 틈을 보이면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하니, 처음부터 빌미
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분들은 학교 드나들기를 좋아하는 학부모들의 아첨에 도끼 썩는 줄을 모른
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아이들을 위해 훌륭한 교육자인 자신이 이 학
교를 떠나기 전에 무엇인가를 하나 남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 학교발전기금을 이용하여 뭔가 좋은 일을 많이 해 보자.”는 생각을 한
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이렇게 마음먹은 교장선생님이 부천에는 너무 많다. 예
를 들어 오정구 어느 초등학교는 학교발전기금을 내라고 각 가정에 통신문을 보
냈다. 학교운영위원장이 발전기금을 조성하게 되어 있는데, 이 학교는 학교운영
위원회, 체육회, 스카우트, 아람단 등의 이름으로 통신문을 보냈다. 교육 예산
이 삭감되어 학교가 어려운데 시급하고 꼭 필요한 사업이니 도와달라고 ‘간곡하
게’ 요청하였다. 학교에 나무 10그루(500만원)를 심고, 운동장 시설(600만원)을
확충하고, 도서(500만원)를 구입하고, 이순신·세종대왕 동상(360만원)을 세우겠
단다.

가슴 아픈 일이다. 지하에 있는 이순신 장군이 울겠다. 차라리 그런 돈이 있으
면 집안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이순신 장군도 힘든 시절이 많았지만 이겨
냈다고 이야기해주겠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아이들 가슴에 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시멘트 덩어리로 학교 교정을 채우려고 이 어려운 시절에 학부모들
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내는 돈으로 사업을 벌일 예정이란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
리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머지않아 발전기금 낸 사람을 공개할 참
인데, 아이 맡겨 놓고 돈 못 내겠다고 버틸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교장이 현직
에 있을 때는 학부모들이 간.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하다가 교장이 그 자리에서
떠나기가 무섭게 남남이 되는 이유를 왜 모를까? 가슴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기 필요에 따라 입으로 사귀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학부모들이
교원 정년을 더 줄이자고 또다시 거리로 나서기 전에, 뻔한 거짓말로 자신과 남
을 속이는 짓을 학교에서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