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장관님께 – 학급 학생수를 줄여 주시오

제 목
교육부장관님께 – 학급 학생수를 줄여 주시오
작성일
2000-05-18
작성자

아래 편지는 1997년 5월에 그 당시 교육부장관에게 보낸 것입니다. 지금 정부 출
범 전이었는데, 장관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네요… 그때 주장한 학교 현실보다 요
즈음 학교 현실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어느 분이 1일 교사로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교사들이 지금 얼
마나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쓴 글이 있었습니다. 지금 교육 현실
이 정말 답답합니다. (한효석)

교육부 장관님께

저는 지금 교육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20년째 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처럼 교직이 힘든 시절이 없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아이들을 놓고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교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을 끌어 안
고 어떻게 해서라도 다독거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골치 아픈 놈들을
골라 학교 밖으로 밀어낼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획일적으로 지시하고 통제해도 그런대로 아이들이 말을 들었습니
다. 그리고 그때는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진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도 다
자기 팔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한 학급에서 드러나게 속 썩이던 한두
아이만 신경을 써도 나머지 아이들은 저절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
개성이 강해,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노래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모두 뒤를
봐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급 관청에 보고해야 하는 각종 공문 처리는 차치하
더라도 학생 관리 면에서 교사 업무가 적어도 20∼30배는 늘어난 셈입니다.

이러니 요즘 담임 교사들은 학급 관리에 매여 한 아이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
할 새가 없습니다. 해마다 학기 초에 교육부에서는 ‘폭력 없는 학교, 체벌 없는
학교’를 강조하지만 폭력과 체벌이 근절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반에 학생이
50명씩 있고서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
로는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이 아니더라
도 한정된 공간에 알맞는 적정한 숫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교사들도 이
제는 사명감만으로 지금 학생수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교사
와 학생이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 주지 않은 채 효율과 경쟁의
논리를 앞세워 학교와 교사와 학생을 몰아 세우고만 있습니다.

지난 4월 24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학부모의 85.8%가 자녀에게 과외를
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출하는 사교육비가 생활비의 17.8%나 차지하기 때문
에 대부분 생활비를 줄여서 살거나(88.8%), 부업을 하여 보탠 적이 있다(8%)고
하는군요.

그 내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에서 만
3세에서 고등학생까지 자녀를 둔 10가구 중 9가구가 과외를 시키고 있으며, 학부
모 10명 중 3명은 과외비 부담이 너무 커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든지 자녀를
조기에 유학 보낼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이런 사교육의 병폐를 해소하려면 우선
공교육을 내실화(34.2%)해야 하며, 다음으로 입시 위주 교육 정책을 개혁(26.2%)
해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서울 YMCA에서 지난 3월에 서울
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삶의 질’에 대해 설문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대답 중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와 높은 사교육
비’가 점점 나빠지는 것으로 으뜸을 차지하였고, 둘째가 ‘먹을 물과 마실 공
기’이며, 셋째가 ‘청소년 유해 환경’이고, 넷째가 ‘사회 범죄와 폭력’이었습니
다. 그 뒤를 ‘악화된 생활 환경, 대형 구조물의 불안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
지,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이 이었습니다. 물론 시민들은 ‘삶의 질’을 높이려면
가장 먼저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를 개선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해소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나머지 문제들이 서로 다른 내용인 듯합니다
만, 제 견해로는 모두다 학교 교육이 부실해서 생긴 문제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교육부 장관께서는 많은 교사들과 국민 다수의 고민을 해결해 주어
야 할 교육 책임자로서 여러 현안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여 업무
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난 1월에 교육부에서 발표한 [97년도 교육부 주
요 업무 계획]을 살펴 보면 교육부는 교사들과 국민들의 정서와는 아주 동떨어
진 업무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범한 소시민도 우리 사회 문제
의 해결법을 알고 있는데, 교육 정책을 입안하시는 분들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
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 추진하겠다는 ‘생활기록부를 대입에 10% 반영, 교원 연수를 학
점화하여 보수와 승진에 반영, 소규모 학급 통폐합, 교육 과정 운영의 다양화,
방과후 교육 활동 운영 개선’ 등이 그렇습니다. 교사 한 명이 학생 50명을 제대
로 평가하여 지금 생활기록부에 원칙대로 기재하고 있습니까? 보수와 승진에 묶
어 놓지 않아서 교원들이 자기 연찬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까? 소규모 학급을 경
제적 효율로만 따져야 합니까? 교육 과정만 다양하게 짜놓으면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합니까? 방과후에 학부모, 외국인을 이용하여 다양한 교육 활동을 펴는 것
이 공교육을 내실화하는 것입니까?

교육부 장관님

장관께서는 한 학급 당 학생수 줄이는 일을 ‘교육부 추진 최우선 과제’로 잡으
셔야 합니다. 학급 당 학생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여 교사들이 이삼십 명만 데
리고 가르칠 수 있다면, 교사들은 자기가 맡은 학생들을 어엿한 시민으로 키워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교육이 내실 있게 자리 잡을 것입니다. 공교육
을 믿지 못해 사교육에 매달리던 병폐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사교육비도 줄
고 학생들이 사람의 도리를 익혀 학교 폭력도 사라지고, 대학에 가거나 안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학생수만 줄이면 교사가 학생들에
게 사랑을 골고루 나눠줄 수 있어 교육계 고질병이던 ‘촌지’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산이 없어 힘들다는 말씀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지난 몇십 년 동안 지긋
지긋하게 반복된 말입니다. 써야할 곳에 쓰지 않으니 학교와 사회가 점점 황폐해
지고 건전한 가치관이 사라지며 불신으로 가득 차는데, 언제까지 예산 타령만 하
고 있으렵니까? 그렇다고 아주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교실마다 멀티 미
디어 기자재며, 실물 화상기를 사서 넣어 준다고 몇천억 원을 쓰고, 교사들에게
컴퓨터를 사준다고 몇백억 원 예산을 세우고, 학생 실습용 컴퓨터를 구입하라고
몇백억 원을 주고, 초등학교 영어 수업을 위해 교사 연수며 원어민 초빙 등으로
또 엄청난 돈을 쓰고 있잖습니까? 교사가 학급 학생들을 감당하지 못해 손을 놓
고 인간적인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 판에, 교실에 실물 화상기나 컴퓨터가 있으
면 뭐하고, 원어민 교사가 오면 뭐합니까? 큰 돈을 들여 초빙한 원어민 교사가
50명 아이들을 앞에 놓고 어쩌지 못하듯이 우리 교사들도 어쩌지 못하는 것뿐입
니다.

참고 삼아 지난 3월 13일 한국 교육개발원에서 제시한 ’96년 한국 교육 지
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교육비는 OECD 회원국의 절반 정도이며, 그나마 초
등학교와 고등학교는 1/4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사교육비를 20조 원쯤으로 추
정하고 있는데 그 돈이 정부 및 자치 단체 교육 예산의 1.5배라고 하니 이 사교
육비를 보태야 그 동안 뒤처진 것에 대한 투자는 생각지 않더라도 겨우 OECD 회
원국 수준이 될 겁니다.

학급당 학생수는 13살 기준으로 한국이 49명이고, 일본 31, 미국 23, 뉴질랜
드 16명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보다 더 어렵게 사는 동남아시아 나라도 50명
씩 놓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금은 21세기를 맞이할 창의적인 교육, 열린 교육
은커녕 과거 같은 획일적인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장관님께서 변두
리 어느 중고등학교를 남몰래 들러 보십시오. 빈 자리도 많고, 엎드려 자는 아이
들도 절반이 넘습니다. 요즘 교사들은 아침마다 ‘오늘도 무사히’를 외고 큰 사고
가 터지지 않기를 빌며 출근합니다. 일선 학교에서는 ‘이제 촌지도 싫다’며 교사
들이 학급 담임 맡기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사 1인당 학생수도 10년 전, 15년 전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또 연간 수업 시
수가 초등학교는 다른 OECD 회원국의 1.5배, 고등학교는 두 배나 됩니다. 학생수
를 줄이고 수업 시수를 줄여줘도 학생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이러 여건에서
는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이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일
선 학교에 ‘상담 우수 사례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쁜 짓하던 학생을 교사
가 이러저러하게 만나 사랑과 관심을 쏟자 크게 달라져 새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
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열 번 안쪽으로 만나도 학생이 변하는 것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사 한 명이 50명 학생을 열 번씩 만나기로 하
면 500번이고 그게 500시간이라면, 교사가 1년 내내 하루에 두세 시간씩만 학급
학생들과 이야기하면 나빠질 학생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교사가 학생들과 수업 외 문제로 하루에 두세 시간씩 진지하게 이야기할 틈이 없
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학급 당 학생수만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면 아이
들을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 컴퓨터며 비디오를 들여 놓지 않
아도, 모두다 훌륭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대안 학교를 설립, 중퇴생과 부적응 학생 재입학’도 중요합니다만, 근본적으
로 그런 학생들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부적응을 교정하는 사람이 교사라
면 교사가 학생을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제대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
가 서울대 어느 교수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서울대 학생들이 버
릇이 없어 자주 혼내주고 있다. 그래도 그 학생들이 잘 받아 들인다.’고 말씀하
시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바꿔 말하면 인간적으로 일러주면 알아 들
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초중고 교사가 예절을 일러줄 틈
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절을 우
리 나라에서는 대학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교육부 장관님,

학급 당 학생수를 제발 줄여 주십시오. 단 번에 줄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교육
부가 정책을 입안하여 되도록 빠른 시일 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
력해 주십시오. 교육에 투자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다른 부처 정책 입안자에게 입이 닳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학교가 바로 서야 많
은 사람들이 공교육을 믿게 되고, 입시 위주 교육 정책에서 벗어나며, 나아
가 ‘학교 폭력, 불신’ 같은 우리 나라 모든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마
련된다는 것도 주장해 주십시오.

교육부에서 올해 추진하겠다는 일들이 정말 답답해 이 편지를 보냅니다. 아이
들과 함께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며 교직에 평생 몸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용기
를 내었습니다. 무례한 점이 있더라도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
십시오.
1997. 5. 5. 부천정보산업고등학교 교사 한효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