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빗자루 영어 공용론

제 목
(칼럼) 빗자루 영어 공용론
작성일
2000-03-29
작성자

최인호(한겨레 신문 교열부장)

망둥이가 뛰니까 빗자루도 뛴다던가.
컴퓨터-인터넷 또는 세계화에서 오는 어지럼증이나 조급증이 마침내 도를 넘어
선 모양이다.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사사롭게 부리는 ’21세기 일본의 구상’이란 모임이
지난 1월 18일 낸 보고서에서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할 것을 검토하자.’고 했
다는 보도가 나가자, 이에 뒤질세라 ‘인터넷 시대의 필수 도구이며, 모르면 글로
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우리도 21세기 일본의 원대한 비전을 배워 영
어 공용화를 시급히 검토하자.’며 이런저런 신문, 방송에서 내리 며칠 사설, 칼
럼, 해설로 법석을 떨어댔다.

이런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하게 비치지만, 짚어 보면 허술한 논리에다 캄캄한 허
방을 숨기고 있다. 일단은 같은 달 26일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회견에서 “영어
는 세계화 시대에 필수적이다. 제2공용어론 얘기도 나오는데, 이는 신중히 검토
할 일로서,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대답을 얻어낸다. 참으로 간단찮은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런 얘기도 나왔다.

“이제 교육은 티칭(teaching)이나 러닝(learning)이 아니라 싱킹(thinking)입니
다….” (14일, 문용린 교육부 장관 취임 인터뷰에서)
“希望의 새 千年 새 아침에 健康과 幸運을 祈願합니다. 지난해에 보살펴 주신
厚意에 感謝하오며 새해에도 변함없는 聲援을 仰請하나이다. 새해 福 많이 받으
시옵소서. 庚辰元旦 (심재기 국어연구원장 연하장에서)

한 나라의 교육부 장관과 국어 정책 실무를 책임진 국립 국어연구원장의 말글
씀씀이가 이 정도이니, 우수마발 지식인, 언론인들한테서 저런 말들이 안 나올
수 없겠다.

세계를 배우고, 개인, 국익을 위하여 우리는 광복 뒤 50년을 넘게 국어와 더불
어 제1외국어로 영어를 가르쳐 왔고, 프랑스, 도이치, 에스파냐, 러시아, 중국,
일본 따위 수많은 제2외국어들을 배우고 가르쳐 왔다.

대한민국 국어 교육의 역사는 영어 교육 역사와 같다. 이 정도로도 지나침이 많
은데, 그것도 모자라 인터넷을 위하여 영어를 공용한다? 또 하나 짚을 점은, 그
렇게 가르치고 배워도 영어를 잘 못 한다는 것은, 못해서라기보다 별로 쓸모가
없는 탓이 더 크다. 무엇이든 꼭 쓸모가 있으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하
게 되어 있다. 실용하지 않으니 실용하도록 상용화하자는 말은, 쓸모도 없는 것
을 국민으로 하여금 억지로 쓰도록 억압하고 독재하자는 말이다. 그러고서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여기엔 세계화 탈을 쓴 ‘장삿속’이 도사리고 있다. 한자 장사
에 이은 영어 장사다.

조선일보사에서는 영어 시험 ‘텝스’를 만들어 ‘세계화 전형료’를 받아 챙기고
도 모자라 ‘영어가 경쟁력’이라며 온 나라를 ‘영어 학교’로 만들 기세다. 이 정
도면 응당 일제 때는 일본어를, 중국 속국 시절에는 한자를 공용 문자로 하자고
외치고도 남음이 있는데, 여남은 언론들도 이와 더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이나 중국 말글은 원시적이고 불완전한 까닭에, 그쪽에서 나오는 영어 공용
론에는 이해와 동정이 간다. 백 년도 전에 영어 공용론이 나온 바 있다. 이는 일
찍이 그들의 언어가 썩 불완전하고 불편하다는 점을 절감하여 스스로 반성 끝에
나온 것 아닌가? 자존심만 접는다면, 그들은 한글을 빌려 그들의 말글을 쓰는 것
이 로마자를 빌려 쓰는 것보다 훨씬 나을 터이다.

컴퓨터는 좋은 연장이다. 동강 난 좁은 땅을 떠나 규제도 임자도 없는(?) ‘가
짜 공간’으로 사냥이나 낚시질을 하며 영역을 넓혀 나간다는 것은 재미있고 유익
한 일이다.

전깃줄로, 무선 인터넷으로, 말로 하는 컴퓨터도 나온다. 인터넷을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울 게 아니라, 사람마다 필요한 만큼 알면 된다. 편하고 쉽게 쓰려고
만든 게 연장인데, 그 연장을 목적으로 가져가자는 말은 사안을 거꾸로 본 것이
다. 국어 정보화, 정보 국어화란 말이 나온 지 오래고, 쓸모 있는 국어-외국어
번역기도 나온다. 이런 것도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21세기 세
종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줄 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한겨레> 2000년 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