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전화 단상 -성해숙

제 목
(수필) 전화 단상 -성해숙
작성일
2000-04-26
작성자

성해숙(주부, 부천시 원미구 보람마을 아주아파트)

조용한 아침 시간을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아래 윗집에서도 전화벨 소리가 동
시에 들려온다. 이젠 필수품이 된 전화는 예전에는 귀한 물건이었다.

대부분 가정이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생활 조사표를 써내게 하여
학생들 생활 수준을 알아 본 적이 있다. 그 표 윗줄에는 전화같은 귀한 물건과
지금은 흔한 전축, 재봉틀, 책상 등이 있는지 표시하는 칸이 있었다. 조사를 해
보면 한 반에 전화 있는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내가 살고 있는 주인집에만 전화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염치 불구하고 그 집 전화를 연락처로 정했다. 그래서 그 전화통은 사람들에게
급한 일을 알려 주는 알림통이 되었다.

그 후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집집마다 전화 있는 곳이 많아졌다. 우리 집은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전화를 놓았다. 그 즈음 지금 남편과 막 사귀던 때였는
데 전화는 남편과 나를 가깝게 만드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 주었다. 매일 남편
마음을 전해 주면서 사랑의 열매를 하나, 둘…영글어 가게 하였다. 그 당시 ‘따
르릉’ 울리는 소리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였다.

그런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 시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
다. 집안 일을 끝내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띠디딕’ 울리는 소리는 반갑지
않다. 우리집 전화는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잠을 자고, 내가 가끔 잠을 자면 그때
는 깨어나 연이어 울리면서 나를 깨웠다.

쉬는 날, 남편은 집에서 전화 받는 것을 싫어 한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거래처
와 전화 상담으로 시달리다 보면 집에서는 편안히 있고 싶어한다. 지난 일요일
에 남편 찾는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누구누구 계시면 바꿔 주세요.” 순간
나는 남편 얼굴을 바라 보며 신호를 기다렸다. 남편은 없다는 신호로 손을 저었
다. 곧바로 내 대답이 이어졌다. “지금 집에 안 계시는데요.” 이런 전화를 받
을 때는 당황하게 되고 거짓말하는 일이 곤혹스럽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거짓말
을 자주 하다 보니 이젠 거짓말 실력이 늘어 남편 신호 없이도 자연스럽게 거짓
말이 나온다.

그래도 전화는 소중한 때가 더 많다. 전화를 통해 시골에 계신 친정 엄마의 목
소리를 들을 때면 더없이 전화가 고맙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 엄마에게 전화
를 건다. 혼자 계신 엄마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이다. “해숙이냐” 이 한마디
만 들어도 건강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기쁨에 목이 메인다. 지금도 사십이 넘은
딸에게 “감기 조심, 차조심하고 잘 먹어라.” 몇 번씩 당부하신다. 자식만을 위
해 살아 온 엄마 당부는 내 나이와는 상관없이 전화할 때마다 계속 될 것 같다.
나에게 소중했던 전화가 또 있다. 작년에 수학 여행 떠난 두 아이에게서 왔던
전화는 먼길 보내고 노심초사 하는 어미 마음을 걱정 없게 해 주었다. 만일 전화
가 없었다면 오랫동안 소식만을 기다리며 속을 태웠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리운 이에게 전화를 건다. 시골 엄마에게, 멀리 있는 친구에게,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정겨운 목소리로 사랑을 보내고
기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