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할머니 -강소라

제 목
(수필) 할머니 -강소라
작성일
2000-05-8
작성자

강소라(주부, 부천시 원미구 중동 주공아파트)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남편이 출근한 뒤 부엌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따
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고 한다. 며칠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편히 숨
을 거두셨다는 말을 듣고도 어제까지도 살아계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일까 싶
어 믿어지지 않았다. 얼른 남편에게 연락을 하고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
다. 차를 타고 가며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할머니 생각에 아무 것도 보이
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생활하셨고, 유달리 몸을 아끼셨던 분이어서 때
로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였다. 원래 타고난 식성이 좋아서 50대
때부터 잇몸으로만 드셨는데도 한 번도 체하거나, 소화가 안 되거나 한 적이 없
다고 하셨다. 물론 가끔 틀니도 사용하셨지만 비위에 안 맞아 하셨다. 손가락으
로 잘게 찢은 고기를 입에 넣고 한참 오물오물 드셨으니, 남들보다 식사 시간이
두세 배는 더 걸렸다.

언젠가는 분리 수거하라며 내놓으시던 수북한 계란판과 우유팩을 보고는 엄마
와 나는 내심 놀랐다. 혼자 몰래 드신 것이 저렇게 많은가 싶었다. 한글을 몰라
이름 석자를 겨우 쓰셨는데, 그 이상하게 쓴 모양에 빙긋 웃음이 나올 때도 있었
다. 때로는 집에서 가까운 경노당에 가신다고 나가셨다가는 잠시 후 조심조심 도
로 들어 오셨다. 문밖에 나갔더니 길이 미끄러워 위험해 되돌아오신다고 하던 모
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건강을 챙기시던 분이 교통 사고를 당했으니, 나는 그때 정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떨 때는 우리에게 교
통 사고 뒷바라지까지 하게 만든 할머니가 너무 원망스러워 어서 가셨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여전히 병실에서 우리보다 먼저 식사
와 약을 챙겨 달라고 하실 정도로 삶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셨다. 퇴원 후 집
에 돌아 왔을 때 할머니는 끼니를 챙겨 주는 식구들에게 잊지 않고 고맙다는 말
을 꼬박꼬박 하셨다. 어쩐지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들렸고, 할머니의
약한 면을 본 것 같아 내내 가슴이 아프고, 안쓰러웠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 가신 것이다. 할머니는 마지막 이승의 끈을 놓으셨을 때
어떤 마음이셨을까? 정신없이 친정 집에 당도해 보니, 할머니는 장의사가 벌써
염을 해서 입관하신 뒤였다. 그런데 눈물이 핑돌 뿐 복받쳐 올라오는 울음 없이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이미 1년 전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어서일까? 아니면 할머니에 대해 사랑보다
미움이 컸던 탓일까? 소녀의 모든 잘못과 섭섭함을 용서하시라고 속으로 빌며,
발인하는 날까지도 당연히 돌아가야 할 사람을 보내는 사람처럼 나는 묵묵히 지
며보기만 하였다. (2000.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