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치즘의 심리 – 에리히 프롬
나치즘의 심리
개발 도상국같이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나라
에서는 ‘개발 독재’라는 이름으로 군인들이 정치에 참여하였다. 우리 나라도 옛
날부터 최근까지 ‘무인(武人) 통치’의 경험이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무인들
이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정권을 잡아 사회 기강을 흐려 놓았다고 본다. 우
리 사회에서는 박정희가 뿌려놓은 군사 문화를 그리워하는 계층이 아직도 많다. 왜 그
런지, ‘군사 풍토’의 폐해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한효석-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추가적인 유인(誘因)이 작용하여 대다수 사람들
이 나치 정부에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있어 히틀러의 정부
는 곧 ‘독일’과 일체적인 것이었다. 히틀러가 일단 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이상,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 독일인의 공동체와의 인연을 끊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정당들이 해체되고 나치 정당이 곧 독일 국가 자체와 다름없게 ‘되었을’
때, 이런 나치당에 대한 반대는 곧 독일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보다 더 큰 집
단과 일체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감정만큼 일반인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의 독일 시민으로서 아무리 나치즘의 원리에 반대한다 하
더라도, 그가 고독한 생활을 하는 것과 독일 국가의 일원으로 소속되는 것 중 한
쪽을 택해야 할 경우에는 대부분이 후자를 택하게 된다.
나치즘에 대해 공격한다는 것은 곧 독일을 공격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
은 비록 나치의 일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외국인의 비판에 대해서는 오히려 나치
즘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고독의 공포와 도덕적 원리의 어느 정도의 약화
는 모든 정당으로 하여금 일단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대부분의 민중의 충성
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고찰은 정치적 선전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 속에 귀결된다.
즉 독일 그 자체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하면 ‘독일인들’에 대한 중상적인 선전은
(제1차 대전 때에 흉노〔Hun〕라고 부른 것과 같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비
록 나치 체제와 완전히 일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충성심마저 증대시켜
주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교묘한 선전으로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며 이는
하나의 근본적인 진리, 즉 윤리적인 원리는 국가의 존재 이상의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이런 원리를 지킴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이런 신념을 함께
가지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진리가, 모든 국가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노동자 계급과 자유주의적, 카톨릭적인 부르주아지의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태도
와 비교해 볼 때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소(小)상점주와 직공 그리고 봉급 생활자
등에 의해 구성되는 하층 중산 계급에 의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계급의 낡은 세대의 사람들은 소극적인 대중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
의 아들과 딸들은 보다 더 적극적인 투사들이었다. 이들 아들 딸들에게는 나치
의 이데올로기 ―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에 대
한 증오의 정신, 정복과 지배에의 갈망, 독일 민족과 북구 인종(Nordic
Race)에 대한 찬미 ― 는 놀라울 정도의 감정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고 그들을 나치 원리의 열렬한 신자와 투사로 만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호소력
이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어찌하여 그다지도 하층 중산 계급에게 호소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층 중산 계급의 사회적 성격에서 추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성격은 노동자 계급과 상층 중산 계급 및 1914년의 전쟁
이전에 살고 있던 귀족의 사회적 성격과는 크게 달랐다. 사실상 하층 중산 계급
에게는 그 역사를 통해서 어떤 특징적인 성질이 있었다. 즉 강자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증오, 비열성과 적개심, 돈을 쓰는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의
발로에 있어서의 인색함 그리고 본질적인 금욕주의 등이다.
그들의 인생관은 편협하고 낯선 사람을 위험시하거나 증오하며, 아는 사람에 대
해서는 호기심과 질투심이 많고 그런 질투심을 도덕적 의분(義憤)으로 합리화하
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들의 생활 전체는 심리적, 경제적으로 결핍의 원칙에 기
초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 [자유에서의 도피], 범우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