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추억 속 그림 여행-성해숙

제 목
(수필) 추억 속 그림 여행-성해숙
작성일
2000-12-4
작성자

성 해 숙(주부, 부천 원미구 상동 보람마을)

남편과 아이들이 다 떠난 조용한 아침. 다른 날 같으면 차 한잔과 책 한 권 옆
에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얼마 전 이사오면서 정리하다만 짐때문에 한가
롭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박스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 놓으려고 베란다로 나갔다. 먼저 아이들 책을 책꽂
이에 막 옮기려는데 구석진 곳에 길게 세워진 물건이 눈에 띄었다. 오래 전부터
남편이 취미 삼아 그려온 많은 그림이 한 다발로 묶여 주인 손길을 기다리듯 벽
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옮기던 책을 한 쪽으로 밀쳐 놓고 잠시 들어다 보려는 마음으로 그림 다발
을 풀었다. 그림은 베란다 바닥에 나란히 펼쳐졌다. 그것을 대하는 순간 감상에
취해 그림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정리하다만 물건들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
았다.

내 앞에 있는 그림 속 마을이 낯설지 않다. 초록색과 물을 많이 섞어 칠한 바탕
색이 자연의 푸르름을 더해 준다. 오 년 전 우리 가족은 이 수채화를 그리러 갈
때 애들 친구 여러 명과 함께 갔다. 남편은 아이들이 좋아할 장소를 찾아 이 마
을 저 마을로 돌아 다녔다. 그 때 우리 일행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곳이 이 그
림 속 마을이었다.

시흥 소래산 아래에 위치한 이 아름다운 마을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 시켰
다. 마을 전체가 초록 정원이었다. 우리는 꽃 축제를 벌이고 있는 정원으로 들어
왔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노란 옷을 입은 개나리가 우리 눈길을 잡았다. 산기
슭에 무리져 핀 진달래와 키 큰 목련도 이에 질세라 분홍 옷과 흰옷을 입고 향기
까지 풍기며 서로가 오월의 여왕이라고 꽃봉오리를 흔든다.

우리는 소가 있는 목장 옆에 자리 잡고 스케치를 하였다. 몇 아이들은 소가
움직일 때마다 그 곳으로 쫓아다니며 소를 그렸다. 또 다른 아이는 남편이
그리고 있는 풍경을 보면서 그대로 흉내내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사물을 직접 보
면서 그리는 일을 매우 즐거워했다.

나는 잠시 즐거웠던 시간을 돌아보고 바로 옆에 있는 서양화로 눈길을 돌렸다.
우거진 나무숲과 싱그러운 풀이 시원한 여름을 느끼게 한다. 나무 사이로는 박
힌 돌이 이어져 길이 나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시냇물 흐르는 계곡이었으리라.
우리가 갔을 때는 그곳에 물 대신 먼지가 돌 위를 덮고 있었다. 그래도 이 숲길
이 오염 되어가는 안양 유원지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었다. 음식점과 술집 포장마
차가 다 차지한 이곳도 숲이 있는 자연은 우리를 오랫동안 머물게 하였다.

바닥에 나란히 놓여진 그림 중에는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한 소래 염전이 있었
다. 파란 하늘 아래에 소금밭이 있고 옆 언덕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다. 창고 주
변을 덮은 갈대 숲 그림이 가을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이 염전 그림은 남편이 완성하지 않은 채 접어 두었던 것이다. 굵은 붓으로
길게 터치한 선들이 완성작보다 오히려 힘차 보인다. 소래는 칠 년 전 우리 큰놈
이 초등 일 학년 때 찾았던 곳이다. 그 때 아이들은 염전에서 소금 만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만져 보기도 하고 입에 대기도 하였다.

이 그림들은 나에게 지난 날 감회에 젖어들게 하였다. 이 외에도 강화 별천지
같은 마을이 그려진 수채화, 우연히 찾은 안양 근처 고향 같은 마을, 안산 물왕
저수지, 시흥 포동 언덕 위의 집…… 이 그림들 하나 하나에는 우리 가족사가
담겨 있었다. 그때 그때 엮어 놓았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각각 그림 속에 그려
져 있었다.

많은 그림 가운데 액자에 끼워진 몇 점을 챙겼다. 마침 일찍 퇴근한 남편 도움
을 받아 거실 벽면에 못을 박았다. 먼저 거실 한 가운데에 염전 그림을 걸고 양
옆으로 수채화 두 점을 걸었다. 식탁 위와 앞쪽에도 두 점을 각각 걸었다. 제목
도 정해서 붙였다. 단조롭던 거실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오며 가며 그림을 들여
다 볼 때마다 지금 내가 그림 속 마을에 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