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 · 밀리오레에서 길 잃기
100살이 다 돼가던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10대 소녀로 회춘했다? 20세기 말 밀리
오레와 두타가 들어서면서 100년 전통의 동대문시장은 그 정도로 확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변화는 한 편의 CF를 통해서 감지됐다.
지금은 김효진, 김민희 등 이른바 N세대들에게 자리를 내 주었지만 2년 전 대표
적인 신세대 스타였던 배두나는, 밀리오레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충격”이라
는 카피를 감전 당한 듯이 움직이는 자기 몸을 통해 우리 뇌리 속에 깊이 각인시
켰다.
배두나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로 유명해진 김효진, 김민희 등 요즘 CF
스타들은 이목구비가 또렷하다거나 몸매가 죽인다거나 특별히 애교가 넘치는 유
형들이 아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약간은 백치 같고 약간은 퉁명스럽고 약간은
뻘쭘해 보이는,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우리 10대들을 많이 닮
아 있다.
알다시피 흔들리는 이들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잡아주는 존재는 학교도 가
정도 친구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 다시 말해서 자기 스
타일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 준다는 거다.
그런 이들에게 값싸고 세련되고 다양한 패션상품들을, 그것도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들의 손에는 유
명 백화점 봉투나 이대앞 보세점 또는 명동거리의 봉지들 대신에 두타와 밀리오
레의 형광색 비닐 백들이 들리게 된 것이다.
천국이라고 했지만 막상 그곳을 가본 어른들에게는 “천국보다 낯선” 곳일지
도 모른다. 한밤중 불야성을 이루는 이 `동대문 밸리’ 입구에는 야외 특설무대들
이 마련되어 있다. 거기선 수시로 DDR 경연대회나 언더그라운드 밴드 공연 또는
아마추어 퍼포먼스들을 관람할 수 있다.
격렬하고 스피디한 프리스타일 스포츠를 즐기는 10대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곳
도 바로 여기다. 공연이 없을 땐 고막을 찢을 듯한 `빽뮤직’이 거리를 가득 메운
다. 굉음에 가까운 음악과 켭켭이 쌓인 군중들을 뚫고 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서
면 의류 뿐 아니라 액세서리, 신발, 가방 등 패션 일습이 층층이 완비되어 있고
구석마다 각종 패스트푸드점과 휴식공간이 숨어있다.
그런가 하면 멀티플렉스형 영화관을 비롯 PC, 게임, 캐릭터 상품, 일본만화 등
요즘 10대들의 인기 문화상품들을 위한 공간이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거나 그럴
예정이다. 특히 밀리오레 옆에 들어선 엠 폴리스는 패션+게임 복합존을 표방하
며 스타크래프트와 DDR을 주 종목으로 한 “짱선발대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결국 이곳은 단순히 상품이 유통되는 시장이 아닌 셈이다.
특히 자기 욕망에 비해 자신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시간과 돈이 턱없이 부족한 10
대들에게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삶을?) 사는 곳이다. 386세
대들이 대학시절 카페에서 죽때렸듯이 지금 중고딩들은 밀리오레에서 마음껏 개
기고 있는 중이다.
몸에 짝 달라붙도록 개조한 교복을 입고 아이찜 가방을 매고 염색머리를 한 채
학교에서 동대문으로 등교하는 10대들은 밀리오레의 가장 중요한 고객층이다. 이
들은 갤러리아 명품관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폭 1.6미터의 좁은 복도를 가득 매
운 채, 번호에 의해서만 식별되는 상점들 사이를 휩쓸고 다니면서 산더미처럼 쌓
인 상품들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아이템들을 빠짐없이 채집해내는 놀라운 능력
을 지니고 있다.
더 넓고 더 조용하고 더 쾌적한 상업공간들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이곳에 오면
정신이 쏙 빠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들 감각에는 복잡하고 헷갈리고 시끄럽
고 소란스러운 이곳이 오히려 제 격이다. 방향감각을 잃으면 불안해지기 십상인
어른들과 달리 10대들에게 방향의 상실, 자기의 상실, 미래의 상실은 어떤 면에
서 피할 수 없는 자신들의 삶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들에게 길잡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 역할은
논노와 앙앙, 키키, 신디 더 퍼키의 패션모델이 맡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
혁, 원빈, 유승준, 전지현, 송혜교, 박지윤이 담당하기도 한다. 물론 보다 실제
적인 가이드들도 있다. 예컨대 20대 초반에서 30대에 이르는 그곳의 언니, 오빠
사장님들이 그들이다. 젊은 나이에 자기 브랜드와 점포를 갖고 있다는 이 디자이
너들은 학교 밖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산 증거에 다름 아니다.
글 백지숙 : 미술 및 문화 평론가로 다년간 활동해 왔으며, 문화평론집으로 “이
미지에게 말 걸기”(시각과 언어)와 “짬뽕”(푸른미디어)이 있다. 한국예술종합학
교 영상원과 미술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