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애완 동물 ‘다마고치’

제 목
컴퓨터 애완 동물 ‘다마고치’
작성일
2001-05-30
작성자

제가 요즘 하도 심심해서 팽개쳐 놓은 다마고치를 도로 살렸네요.. 아래 글은 다
마고치가 유행하던 때(97. 5월), 썼던 글입니다…

컴퓨터 애완 동물 ‘다마고치’

‘애완’은 원래 ‘사랑할 애(愛)’와 ‘옥이름 완(玩)’이 만나 이루어진 단어이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옥을 사랑한다’는 뜻인데, 요즈음 말로 해석하면 ‘손아귀에
들 만한 물건을 가까이 두고 즐기다’쯤 될 것 같다.

그런데 ‘애완 동물’이라는 말은 있어도 ‘애완 식물’이라는 말은 익숙지 않
다. ‘애완 인간’이라거나 ‘애완 자동차’라는 말은 더더욱 어색하다. 아이들 장난
감을 ‘완구’라고 하는 것 따위로 미루어 보아, 이 ‘애완’에는 처음부터 식물이
나 사람, 큰 물건은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애완’에 왜 식물이 포함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식물이 인간의 사랑
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다못해 어항 안에 있는 물고
기도 먹이를 주려고 하면 사람 가까이 헤엄쳐 온다. 그러나 식물은 반응이 더디
고, 동물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식물을 애완하기로 하면 주인이 식물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
다. 그러니 옛날에 선비들이 난을 키우고 벗하며 지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경
지를 넘었다는 뜻이다.

‘애완’에 인간도 포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엄연한 사람
을 또다른 한쪽에서 ‘데리고 놀던’ 때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조선 양반들이
노비를 부렸고,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삼았으며, 일본 군인들이 조선 여성을
위안부로 끌어가기도 했다. 어쩌면 돈주고 살 수 있는 요즈음 환락가 여자들
도 ‘애완’의 범주에 속할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애완물로 대한다는 것은 그렇게 대하는 사람도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지 모른다. 위안부 숙소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
며 줄서 있는 일본군들은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짐승’이
라는 말이 더 알맞은 말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로 만나려 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수직
적인 위치에서 자기 뜻대로 상대방을 바꾸지도 못한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조차
부모에게 ‘날 내버려둬라, 간섭하지 말아라,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한다’는 말도 설득력을 잃고 있는 판이다.

그러니 자동차같이 큰 물건은 주인이 손안에 넣고 감당하기 어려워 가까이 둘
수 없다. 식물은 반응이 거의 없어 애완하기 힘들다. 사람은 사람이라 안 된다.
그래서 ‘애완’이라는 말에는 ‘동물’이라는 단어만 자연스럽게 붙어 쓰인 것 같
다.

애완 동물 중에서는 개가 사람과 감정적으로 쉽게 교류하고 반응도 구체적이라
서 사람과 가장 오랫동안 잘 지내 왔다. 또 ‘당신의 개가 되겠다.’라는 비유처
럼 ‘주인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고, 오히려 주인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언제나
복종하기’ 때문에 여전히 인기가 높다.

그런데도 강아지를 끌어안고 다니는 사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직도
곱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강아지를 짐승으로만 생각하고, 개와 주인의 관
계를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개를
말동무로 삼는다고 개가 사람이라도 되느냐고 비웃기도 하고, 그런 정성을 사람
한테 쏟아 놓지 않는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입만 열면 다른 사
람 험담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주변에 있는 돌멩이 하나 풀 포기 하
나에라도 정성을 쏟는 것은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오고가는 인정이 얄팍해지면서 사람끼리 부딪쳐 서로 상처받는
경우가 흔해졌다. 어떤 때는 부모도 제 자식 속을 알 수 없어 자식을 탓하고 답
답해하기도 한다. 연인이나 낯선 이웃한테서 자기 사랑을 바로 확인하기는 더더
욱 어렵다. 그러니 들인 만큼 결과를 뚜렷하게 확인하기로 치면 사람이 개를 따
를 수 없다. 정성을 들이니까 금방 예뻐지고, 주인 기분을 먼저 알고 개가 주인
뜻을 거역하지 않는데 어찌 귀엽지 않을까?

더구나 남자들은 그래도 가끔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있으나, 여자들과
아이들은 제 마음대로 떡주무르듯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
니 사람이 억압당하는 만큼 자기 손으로 잘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는 것이
라면, 강아지에 정성을 쏟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이 드러난 것
으로 볼 수도 있겠다.

또 강아지를 좋아 한다는 것은 사람끼리 오고갈 수 있는 따뜻한 정을 그리워 하
지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
서 인간 관계가 차가워질수록 더욱더 강아지가 늘어날 것이다. 미래의 인기 직업
인에 ‘개 미용사’가 들어 있다니, 어쩌면 현대는 강아지 전성 시대인지도 모른
다.

언젠가 우리는 초등학교 다니는 작은 아이 성화로 다람쥐를 사서 키운 적이 있
었다. 어렵사리 다람쥐를 사 들여오던 날 우리 가족은 우리 안을 마냥 들여다 보
았다. 밤이며 과자를 주었을 때 다람쥐가 양손으로 쥐고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여러 달을 함께 살아서 다람쥐가 주인을 알아보고 익숙할
만하다 싶어도 끝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먹이를 주거나 물 청소를 하려고 우리
문을 열 때마다 다람쥐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우리만 다람쥐를 좋아하지, 다
람쥐는 언제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

나중에 정성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식구들이 다람쥐에 싫증을 내었다. 결국 다
람쥐 돌보는 일이 짐으로 바뀌어, 처음 샀던 곳으로 다람쥐를 다시 돌려보내고
말았다. 정이 오고가지 않으면 사람이나 짐승 할 것없이 서로 부담스러운 존재라
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최근에 작은아이가 장난감 ‘다마고치’를 선물로 받았다. 작은아이는
이 ‘다마고치’ 기계에 푹 빠져 버렸다. ‘다마고치’는 테트리스를 하는 것처럼 단
순히 게임을 하는 기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삐삐 만한 물건 안에다 공룡을 키우는데, 화면에 있는 공룡이 주인에게 재롱을
떨거나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밥을 달라고 보채기도 한다. 아이가 제 때에 밥
을 주지 않거나 치료를 하지 않으면 죽어 버릴 때도 있다. 주인 뜻대로 키울 수
있고 주인의 정성에 따라 바로 반응하기도 하는 장난감이었다.

‘다마고치’는 컴퓨터 시대의 ‘애완 동물’인 셈이다. 게다가 인간이 진짜 동물
때문에 겪어야 할 여러 불편이 제거되고 등장하였다. 털이 날리지도 않고, 진짜
똥이나 진짜 먹이 때문에 번거로울 필요가 전혀 없고, 개를 끌어안고 다닌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비난받을 일도 없으니, 이제는 그나마 ‘개 팔자가 상팔자’였던
세상도 지나가는 모양이다. (97.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