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외래어를 섞는 버릇
글로 쓰인 출판물을 읽노라면 내팽개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전부 ‘캐리어 우먼의 파워는 어디서 오는가, 오늘의 골든 프로
는 매거진 포커스입니다, 다른 루트를 찾은 특종맨에게는 건강룸에서 헬스할 수 있는
티켓을 준다.’는 식입니다.
어느 신문에서는 새 총리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교수만 지냈다고 ‘서울대맨’이
라 표현하고, 선동열이 일본 주니치 구단에 입단하며 ‘포토 데이를 가졌다.’고 보도합
니다. 이렇게 외래어를 이용한 표현 방식은 우리 글을 오염시킵니다. 우리 글 조어 방
식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조어법이 영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일본어에
서 영향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릅니다.
어느 나라든 다른 나라 말을 받아들여 제 나라 말로 바꿀 때는 뜻(훈)과 소리(음)를
살펴 자기네 글자로 표기합니다. 예를 들어 ‘water, sky’는 뜻을 찾아 ‘물, 하늘’로
바꾸어 씁니다. 그러나 뜻을 찾기 어려우면 다른 나라 말소리대로 자기네 글자로 그
냥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bus’를 우리 글자로 ‘버스’라고 약속하여 씁니
다.
물론 자기네 문자 범위 안에서 표기하다 보니 다른 나라 말소리를 원래대로 정확하
게 표기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에 있는 [b, v]를 구분하지 않고 한글로는 그
냥 ‘ㅂ’으로 바꾸어 씁니다.
우리 언어 생활에서 외국 것을 받아들이며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은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해 놓고 읽을 때입니다. 아라비아 숫자 읽는 방법이 아주 다양합니다. 가령 ’4번
선수가 4번이나 실수하다니, 앞으로 3∼4번 더 두고 보다가 실수가 4이 넘으면 연봉
을 4장으로 줄이겠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정확하게 읽으려면 앞에서 부터 ‘사, 네, 너, 넷, 넉’으로 읽어야 합니다. 똑같
은 ’4′이지만 소리(음)대로 읽기도 하고 뜻(훈)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 관례
에 따라 읽기도 합니다. 쓰일 때마다 숫자 읽는 법이 달라 하나하나 익혀야 하므로 아
주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도 외래어를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뜻과 소리를 살려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club, romantic, Europe’을 ‘俱樂部, 浪漫的, 歐羅巴’같이 바꾸어 썼습니다.
그러나 일본 글자 ‘가나’로만 뜻을 전달하기에 불완전한 면이 있어 중국 한자를 빌려
다 섞어 쓰는 것인데, 한자가 중국 글자라서 일본 사람들이 한자를 익힐 때 문제점이
아주 많습니다.
위에 쓰인 한자가 어디에 있든 한국 사람에게는 소리값(음가)이 하나로 정해져 있습
니다. 그러나 우리가 ’4′를 때에 따라 ‘사, 네, 너, 넷, 넉’으로 읽듯이, 일본 사
람들은 이 중국 한자를 뜻으로 읽기도 하고 소리대로 읽기도 하며, 지역에서 쓰이는
말습관에 따라 달리 읽습니다. 한자마다 모두 이런 식이라서, 일본어에 쓰이는 한자
는 일본 사람조차 평생 배워도 완벽하게 읽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일
본 사람들은 자기 한자 이름 위에 ‘가나’로 토를 달아 줍니다. 그렇게 해야 상대쪽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것이 여러 모로 불편하니까, 요즘에 와서 외래어를 받아들일 때
뜻(훈)을 살려 한자로 바꾸지 않습니다. 외래어를 되도록 그 나라 소리(음)대로 받아
들여 자기네 글자인 ‘가나’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automatic’을 ‘自動的’으
로 바꾸지 않고 ‘オ-トマチック(오토메티쿠)’로 표기합니다. 영어를 한자로 바꾸지 않
고 ‘가나’로 표기하니까, 한자음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고 ‘가나’만 알면 아무나 읽
을 수 있으며 뜻도 금방 배우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일본 사람들이 ‘automatic’을 ‘自動的’으로 바꾸고 읽는 법을 제대로 가르
치지 않거나, ‘自動的’이라는 글자 위에 읽는 법을 ‘가나’로 써놓지 않으면, 일본 사
람마다 달리 읽을 판입니다. 우리 말 식으로 표현하자면 ‘자동적, 스스로움직임적, 자
움직임스럽게, 자동답게, 제멋대로스럽게’ 따위로 제각각 읽었을 겁니다.
‘automatic’을 원래 소리값과 많이 다르게 ‘오토메티쿠’로 표기하는 것은 일본 글자
인 ‘가나’ 50음 범위 안에서 표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는 우리 글자와 많이
달라서, 받침이 거의 없고 모음 수가 아주 적습니다.
특히 우리 모음에 있는 [ㅓ, ㅡ] 소리값이 없습니다. 그래서 ‘clutch,flash,plastic,
center, double’을 50음 범위 안에서 ‘구라찌, 후라쉬, 부라스티쿠, 센타, 다부루’로
표기합니다. 그러니 ‘automatic remote control’을 일본 글자 식으로 표기하면 ‘오토
메티쿠 리모토 콘토로루’가 됩니다.
이 표기가 원래 발음과 비슷하지도 않지만 아주 길어서 쓰기에 무척 불편합니다. 그
래서 자기네 글자 생활에 편리하도록 ‘오토 리모콘’으로 줄여 표기합니다. 그러므
로 ‘apartment(아파트먼트), dress shirt(드레스셔츠), personal computer(퍼스날 컴
퓨터)’가 ‘아파토, 와이샤쓰, 파스콤’으로 글잣수가 준 것도 일본에서 시작한 것입니
다. 물론 이런 말은 영어 사전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일본 사람들이 현재 일본어 안에 쓰이는 한자어가 불편해서 자기들도 모
르게 한자를 내버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 외래어에서 소리를 빌려다 쓰되 ‘가나’로 표
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550년 전에 ‘소리 글자(표음문자)’로 시작하여 ‘훈민정
음(한글)’을 만들었는데, 일본어는 지금에서야 ‘뜻 글자’를 버리고 ‘소리 글자’로 가
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일본어 사정도 모르면서 외래어를 표기할 때 우리가 약속
한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일본어 발음과 조어법에 따라 적습니다. 일본식 어법
인 ‘테레비 프로’가 우리 표준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밀어낸 지는 벌써 오래되었습
니다. 사람들이 결의를 다질 때는 일본식으로 ‘화이팅(표준말: 파이팅)’을 외칩니다.
우리 나라 재벌 회사에서 내건 간판 이름이 전부 ‘프라자(표준말: 플라자)’이며 ‘쎈타
(표준말: 센터)’입니다.
상품 이름도 일본어식 표기대로 ‘훼미리 쥬스(패밀리 주스), 빠이롯드(파일럿) 만년
필, 칼로리 바란스(밸런스)’여서 우리가 약속한 표준말이 아닙니다. 우리 글에 미숙
한 어린이에게 파는 과자조차 표준말을 쓰지 않습니다. 누군가 조사해보니 ‘초콜릿,
비스킷’을 잘못 표기하는 방식이 백 개도 넘는다는군요. 그 회사 담당자 옆에 우리말
사전 하나만 있어도 그렇게 표준말을 무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얼치기’ 지식인들이 한글 문장에 외래어 섞어 쓰는 것을 세련된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약속한 표준말이 아니라 일본어식 조어법을 흉내내고 있
습니다. 예컨대 ‘상승 무드를 타서 챤스가 돌아 왔다, 오일을 만땅으로 채우고 미
국을 투어하는데 스토리가 이상하더라, 앤티크 가구로 인테리어한 집보다 단순한 데커
레이팅을 통해 생생한 휠을 담아야 해. 싸이즈와 칼라를 소화할 만한 에이급 모델이
야.’ 따위가 아주 심하게 오염된 말들입니다.
특히 여성 잡지를 만드는 출판인들과 방송사 프로그램 제작자, 신문사 편집자가 일본
어식 조어법을 심하게 본뜨고 있습니다. 영어 단어에서 철자 하나 틀리는 것을 부끄러
워하고, 한자에 획 하나 빠진 것은 민망해 하면서 우리 글을 바로 쓰려고 우리말 사
전 찾아보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글을 쓰는 것은 이 모양인데 유네스코에서는 한글 반포 550돌을 맞아 크
게 기념 사업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다른 나라에서 차려준 젯밥을 드
시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