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비(NIMBY)는 정당하다
[한겨레21] 2003년07월30일 제470호
님비(NIMBY)는 정당하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옳은가
…갈등을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법
우리가 신문에서 심심찮게 듣는 얘기가 ‘집단이기주의’야. 어떤 사람들이 자
기 동네에 쓰레기처리장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해서 데모라도 하면 어김없이 등장
하는 말이지.
더 큰 님비
‘집단이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가 뭐게? ‘대를 위
해 소를 희생한다’는 거지. 그렇게 해서 전체 사회가 유지된다나?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은 다수에 속해
있다는 거지. 만약 소수가 기꺼이 자기 이익을 포기한다면 그건 아름다운 거야.
그렇지만 그 소수가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은 아냐. 거기
에 대놓고 집단이기주의 운운하는 건 다수의 횡포라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말야, 그 다수란 게 누구지? 그 쓰레기처리장 덕분에 이익 보는 사람이
야. 이렇게 따지고 들면, 아주 심각한 결론이 하나 툭 튀어나와. ‘집단이기주
의’라 비난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집단이기주의자’라는 거지. 자기의 쾌
적한 환경을 위해 남에게 더러운 환경을 강요한 거니까.
언젠가는 당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란 게 불가피해보일지도 몰라. 그러나 이 한 가지
만은 알아두자고. 그런 주장이 통하는 사회에서라면, 언제 내가 소수가 될지 모
른다는 사실 말야. 자업자득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이건 노동자들의 파업이
나 농민들의 시위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자기 권익을 주장하는 사람들
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언젠가 내가 권익을 주장할 때 고스란히 그 비난을 되돌
려받게 된다는 말씀. 이처럼 다수의 이익(‘민족의 이익’이니 ‘국가경쟁력’이
니 하는 말도 다 똑같아)이라면 무조건 옳다는 식의 주장이 통하는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의 권리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 명심하자고.
사회적 합의는 가능한가
쪽수로 소수를 밀어붙여서 이룬 합의는 사회적 합의가 아냐. 그건 소수를 굴복시
킨 것에 지나지 않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합의를 이뤘을 때만 진정한 사
회적 합의라 할 수 있단 말이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일일이 사정을 다 들
어주면 쓰레기 천지가 될 거라고 아니지. 거꾸로 님비를 정당한 권리 주장으로
받아들였을 때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 그때부터 대등한 대화와 타협
의 길이 열린단 말이지.
가령 ‘좋소. 땅값을 세배로 보상하겠소’라는 타협을 할 수도 있겠지. 누가 그
돈을 감당하냐고 그야 수혜자가 내야지. ‘애걔, 그러면 차라리 우리 동네에 짓
겠네’라는 말이 나오면 그 순간 문제는 절로 해결된 거지. 최적지에다 짓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처럼 진정한 사회적 합의는 모든 개인을 권리 주체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
하는 거야. 이게 갈등을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법이지. 아울러 나 자신이 사
회 전체와 맞먹는 권리 주체가 되려면 사회적 약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
지 말자고. 그게 바로 내 권리를 지키는 길이니까.
우한기 | 광주 플라톤 아카데미 논술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