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제 목
그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작성일
2007-09-29
작성자

1988년, 30대 중반으로 제가 어느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였지요.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고등학교였는데, 학생들이 대학에는 많이 못 갔지만, 역사가 깊
?고, 학생과 학부모들이 아주 순박하였습니다. 인터넷과 휴대폰, 컴퓨터 게임이
?없던 시절이니, 남학생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것이 가장 큰 놀이이면서 즐
?거움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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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학교신문을 창간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찍었습니다. 학생들 글과 그림
?을 넣고, 뒤에는 마을 소식을 실었습니다. 재주 없는 학생들을 위해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구절 써내기, 퀴즈 풀기와 세 줄짜리 시 짓기 따위를 넣었지요.
?그 덕에 신문이 나오는 날에는 전교생이 수업 시간에 신문을 몰래 보느라고 하
?루 종일 수업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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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신문이 그 당시 기준으로는 참 독특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발행, 육성
?회장 글과 교장 글이 없는 학생 신문, A4만한 크기, 학교 예산 없이 후원금만으
?로 인쇄, 졸업 동문들에게 발송. 그 탓에 우리 학교신문이 조금씩 유명해져서
?나중에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고, 지역 신문과 월간지 등에서 우리 신문을 취재
?하여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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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교감과 저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교감은 학
?교 업무를 조정하여 신문 만드는 일을 다른 교사에게 넘겼습니다. 그 교사는 일
?이 늘고, 저는 즐거운 일거리를 뺏긴 셈이었지요. 교감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그 교사가 다음 달 신문을 만들 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문을 내
?지 못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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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 나이 지긋한 그 학교 동문이 제게 전화를 하였습니
?다. 그 동문은 그 동안 학교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몇 십 년 만에 받아보는
?후배들 신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잠깐이나마 고향을 생각하였는데, 최근에
?는 학교신문이 안 온다는 거지요. 학교신문 담당자인 제가 교감과 싸워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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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더니 그 동문이 제게 학생들을 사랑하느냐고 묻더군요. 학생을 사랑하는
?교사가 자기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느냐는 겁니다. 겉으로
?는 학생을 더 사랑하다면서, 속으로는 자기를 더 사랑한다. 학생을 사랑하는 척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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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이 제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사랑이 뭘까? 그날 밤 밤새 뒤척였지요. 그
?리고 부끄러웠습니다. 학생을 위해 신문을 만든다면서, 언젠가부터 그 신문이
?나를 드높여주는 도구가 되었지요. 나 없으면 신문을 만들 수 없다고 교만하게
?굴었으며, 그 탓에 다른 교사에게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신문을 만들지 못할 때
?는 ‘그것 보라.’며 다른 사람 상처를 보며 만세를 불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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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날 교감에게 사과하였습니다. 신문 만드는 일을 다시 맡았습니다. 그
?리고 신문이 다시 발행되었습니다. 그 학교를 떠날 때까지 달마다 한 번도 빼
?지 않고 신문을 냈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 학교 동문이 지적했던 ‘제대로 사랑
?하는 법’을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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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자존심을 앞세워
?서는 안 되며, 자신을 좀더 낮추어야 한다. 뻔히 알면서 지는 것이 사랑이다.
?나무 그늘과 공기처럼 없는 듯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지 즐
?기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