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뿌리가 먹여 살린다

제 목
잔뿌리가 먹여 살린다
작성일
2004-04-10
작성자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빌딩도 당연히 그 건물을 받칠만한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
?어야겠지요. 건물뿐만이 아니라 온 산에 널린 꽃이며 풀과 나무도 뿌리가 받쳐주
?어야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물은 먼저 뿌리를 키우고 그 뿌리가 감당
?할 수 있을 만큼 자랍니다. 뿌리가 부실한 채 키만 큰다면 그 식물은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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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조경 전문가들은 나무 성질을 알고 자연을 이해하면 사시사철 나무를 심
?거나 옮겨도 된답니다. 나무를 반드시 봄에만 심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군요. 예
?를 들어 어떤 나무를 옮기려고 뿌리를 쳐내면, 그만큼 뿌리가 제 구실을 못하므
?로 뿌리와 가지의 조화가 깨진답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잘라낸 만큼 가지를 쳐내
?거나 잎사귀를 훑어주어야 산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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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도 뿌리 나름대로 제 몫이 있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
?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굵은 뿌리가 기세 좋게 뻗어야 한다는 겁니
?다. 넓고 깊게 뻗은 굵은 뿌리가 그 나무를 지탱하는 힘이니까요. 그래도 그 나
?무를 실제로 먹여 살리는 것은 그 굵은 뿌리에 붙은 잔뿌리지요. 그 잔뿌리를 통
?해 양분을 흡수합니다. 그래서 나무에 매달려 나무를 흔들어대면 잔뿌리가 끊어
?져 나무가 죽고, 나무를 옮길 때 흙을 탈탈 털면서 잔뿌리마저 털어내면 새 땅
?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해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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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면으로 소나무는 아주 까다로운 나무입니다. 굵은 뿌리를 잘라내고 옮기
?면 대개는 새 땅에 적응하지 못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소나무를 옮기려면 지금
?있는 곳에서 굵은 뿌리를 잘라내고, 그 잘라낸 뿌리에서 자신을 유지할 만한 잔
?뿌리가 돋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답니다. 마치 아이들에게 홍역을 미리 살짝 앓
?아 지나치게 하는 것처럼, 자기가 있던 땅에서 소나무에게 미리 몸살을 앓게 하
?여 잔뿌리를 무성하게 키웁니다. 나중에 잔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흙덩어리째 떠
?다 옮기고, 다른 지지대로 굵은 뿌리 구실까지 보완해주면 새 땅에서도 바로 뿌
?리를 내리고 산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옮긴 소나무가 죽는 것은 대개 몇 년 준비
?하여 옮기지 않고, 그 해 바로 옮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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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뿌리는 중심을 잡아 나무를 지탱하고, 잔뿌리는 열심히 양분을 흡수하여
?나무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명을 유지한다. 이 굵은 뿌리를 집안이나 사회를 지탱
?하는 사람으로 빗댄다면 정치인이나 사회 원로쯤 될 겁니다. 잔뿌리는 각자 자
?기 위치에서 열심히 사는 서민들을 가리키겠군요. 굵은 뿌리가 부실하면 지지대
?로 받쳐야 나무가 쓰러지지 않습니다. 태풍이라도 불면 그렇게 받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잔뿌리가 상하면 나무가 죽습니다. 죽지 않으려면 가지를 쳐내거나
?잎사귀를 훑어내듯이, 여기저기를 뜯어고쳐 그 가정과 사회의 규모와 역량을 대
?폭 줄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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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제가 보기엔 굵은 뿌리보다 잔뿌리가 제 몫을 잘해야 사회가 조화롭게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사회 지도층보다 서민들이 건강해야 우리 사회
?가 더욱 건강할 것 같습니다. 조경 전문가에게 배운 이치대로 저도 가지를 쳐내
?고 이번 식목일에 배나무 다섯 그루를 마당에 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