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행기 2 – 시베리아 횡단 열차 60시간
6월 8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몸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대충 조립하
여 만든 것 같은 부실한 침대가 그나마 작아서 발이 밖으로 나가고, 매트는 내려
앉아 잠을 편하게 자지 못했지요. 호텔 시설이 우리 나라 여관 장급만도 못한 것
으로 보아, 아직 여러 모로 러시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창문에
친 두꺼운 갈색 커튼과, 텔레비전 하나 달랑 얹어놓은 호텔 집기가 아주 조잡하
지요. 침대 담요는 70년대 우리네 집집마다 있던 신앙촌 빨간 담요와 비슷합니
다… 오른쪽 사진은 우리 일행이 어제 맥주를 마시던 “B52″라는 레스토랑을 찍
은 것입니다.
어제 사람으로 가득 찼던 광장에 나가보니, 굉장히 지저분했던 거리가 말끔히 청
소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
다.. 분수는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제 밤에 못 보았던 레닌 동
상도 있었습니다…. 모라토리움으로 공산 정부가 무너지던 때, 사람들이 모스크
바 광장에 있던 레닌 동상을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모스크바에서
9천킬로나 떨어진 곳이라서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시골 사
람들이 도시와 떨어져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광
장 한 편에 주변 건물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산뜻한 부스가 있어 들여다보니, 간
단한 음료수 잡화를 파는 매점이더군요… 정찰표를 붙여 놓았는데, 대개 우리
돈으로 500원 안팎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작은 돈은 아닙니다.
우리 일행은 전철(트롤리)을 타고 중앙 시장 바자르에 갔습니다. 트롤리든 버스
든 문 가에서 차비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11시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전에 사흘 동안 기차 안에서 먹고 마실 식료품을 사
야 했지요… 시장에 가니 우리네 백화점 지하 상가처럼, 또는 동대문 의류 상가
처럼 한 코너에 한 가게가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가득하고, 실외에
는 실외대로 우리네 5일 장터처럼 물건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에 있는 것은 우리 나라 마늘쫑 같은 채소입니다.
우리가 러시아 하면 떠올리던 추운 곳, 두꺼운 옷을 입고 상점 앞에서 줄 서있
는 사람들, 거칠고 험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더운 여름, 얄팍한 옷을
입고, 깔끔하게 다듬은 파나 과일을 열심히 파는 모습은 지금 우리네 시장과 조
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상인 중에는 집시 같은 소수 민족, 조선족 사람
도 많아, 마치 우리 나라 전주나 원주 시장에 온 것 같았습니다.. 가운데 사진에
서 물건을 파는 아가씨는 러시아 사람과 조선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입니
다… 오른쪽 사진에 있는 과일은 대부분 중국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복숭
아, 키위, 멜론, 오렌지, 참외, 자두, 사과가 보이네요…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탔습니다… 이곳부터는 한 여사님의
사위인 유 선생님이 안내하기로 하였습니다… 기차표를 사야 기차를 탈 수 있는
데, 여권을 제출하고 며칠 전에 신청해야 한다고 합니다. 내국인도 마찬가지라
고 하니, 이 나라는 아직도 국민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
니다..
기차를 타다가 역에서 러시아 경찰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경찰이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에게 검문을 했는데, 가이드인 한 여사님이 아주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였
습니다… 한 여사님 말로는 이 도시에 중국 사람이 몇십 만 명 가까이 몰려 들
어와 살면서, 여러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데, 우리 같은 여행자는 조그만 약점만 있어도 뒷돈을 먹으
려고 집적거린다는 것이지요… 거기 경찰도 강한 사람에게는 약한가 봅니다…
한 여사님의 기에 질려, 뒤통수를 긁으며 젊은 경찰이 물러섰습니다… 물론 우
리는 여행에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가운데 사진은 어느 역에서 기
차가 잠깐 쉴 때, 우리 일행이 아이스크림 사먹는 것을 찍은 것입니다.. 러시아
여행 도중 느낀 것인데, 어디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든 아이이스크림이 아주 맛있
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줄여서, 영어로 TSR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로, 길이는 약 9300킬로미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6박7일. 우리가 가
야 할 이르쿠츠크까지는 2박 3일. 약 60시간. 21개 역을 통과하며 역마다 10분∼
20분 정차. 약 3000킬로미터… 무슨 숫자든 상상하기 힘들만큼 큽니다.
침대칸은 2인 1실도 있고, 4인 1실도 있습니다. 우리는 4인 1실을 썼습니다. 남
녀를 가리지 않고 태웁니다.. 객실 양쪽에 침대가 붙어 있고, 이층에도 잠자리
가 있으니, 비좁아도 네 명이 며칠 동안 같이 생활해야 합니다. 차량 한 칸 양
옆에 화장실이 있고, 거기에서 아침에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합니다. 여행 중 사람
들이 대부분 머리는 안 감더군요.. 여럿이 써야 하는 곳이므로 물을 아끼느라고
못 감겠죠.. 차량마다 담당 승무원이 있는데 시트와 담요를 줍니다. 처음에는 좁
아서 답답했으나, 며칠 지나니까 적응이 되더군요… 물론 우리보다 덩치가 큰
러시아 사람들도 좁은 데서 잘 지냅니다.. ^^;
밥은 각자 알아서 먹습니다… 뜨거운 물은 승무원실 옆에 있어서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스턴트 밥과 라면과 커피, 김치, 깻잎, 김, 고추장 등을
가져갔습니다. 시장에서 빵도 샀구요…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시간을 넉넉하
게 줍니다(20분쯤). 그때마다 찐 감자, 구운 생선, 삶은 달걀, 과자, 아이스크림
을 사먹을 수 있지요… 기차가 설 때 정거장에 내려 그 사람들이 나무 상자에
올려놓은 물건을 구경했지요. 아주 보잘 것이 없더라구요… 1만 원 정도면 한
사람이 내놓은 것을 다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나라 70년대쯤, 기차역에서 사
과며, 찐고구마를 팔던 아주머니, 아이들이 떠오르대요. 그 사람들이 지금 그렇
게 살고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잘 살펴보면 우리 나라에서 수출한 “도시
락” 라면과 “꽃게랑” 스낵과자가 보일 겁니다.. “도시락” 라면을 얼마나 수출했
는지, 여행 도중 러시아 곳곳에 엄청나게 널려 있었습니다…
기차에 식당 칸이 있었으나, 우리는 딱 한 번 갔습니다… 우리네 기차 식당 칸
처럼 시중보다 비쌉니다. 그러니 러시아 사람은 더더욱 식당 칸에 못 갈 겁니
다… 실제로 사흘 동안 그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덕분에 퍽퍽 사먹고 퍽퍽 사주는 우리를 식당칸 종업원과 홍익회 아주머니가 아
주 좋아했지요. 그 사람들이 공무원인지? 식당칸에서 우리 일행은 돌아가며 노래
도 부르고, 식당칸 종업원들도 우리를 위해 러시아 민요도 불러주고…. 노래를
부르는 러시아 젊은 처자가 참 예쁘지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러시아 농촌에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한
적한 곳이었지요… 대부분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었고, 역사와 관공서, 학교 같
은 것을 돌이나 빨간 벽돌로 지었습니다.. 흔한 것이 나무이고, 귀한 것이 돌과
빨간 벽돌인 모양입니다…. 물론 시멘트로 지은 건물도 흔치 않았습니다…
여행 중 퍽 특이한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동묘지였습니다. 공동묘
지가 마을 옆에 있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죽은 사람을 가까이 볼 수 있
더군요. 죽음을 멀리 하지 않고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
니다. 아무 때나 꽃을 드릴 수 있겠지요… 죽은 사람이 우리처럼 삶에서 멀어
진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기차 여행 60시간은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
는 광야와 기차 양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작나무 숲과 초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 시간은 아름다웠지요.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기차 여행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지요. 더구나 이곳은 밤 12시가 되어야 겨우 해가 집니다. 아침 4시
면 해가 뜨고요. 한국 같으면 한참 잠들어 있을 시간인데도 우리 일행은 자는 것
에 익숙지 않았지요. 그래서 밤새워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승무원에게 여러 차례
지적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팩소주는 첫 날에 동이 났습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떠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는 것이 수다, 보드카, 맥주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그 긴긴 겨울에 왜 술을 많이 마시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원래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자기가 들어 있는 객실 빈 침대에 누가 들어오느냐
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짐작하시겠지요?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서 청춘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질 수 있겠다는 사실을…. 어느 분이 그러
시더군요.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가며 있었던 일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에 잊
는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았으니, 새로 사람 사귈 일이 없었지요.. 설
령 늘씬한 러시아 미녀가 한 방에 있었다 해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옆 칸에 러시아 꼬마가 있었습니다. 네 살이나 되었을 법한 여자 아이가 우리들
의 대화 상대였지요. 러시아 남자애들도 우리 나라 남자애들처럼 숫기가 없어 우
리들 가까이 오지 않았어요. 이 꼬마 이름이 어려워, 우리는 “니빱바, 니빱
바”로 불렀습니다. 그 꼬마애가 기차 통로에서 우리와 숨바꼭질할 때 양 주먹을
배 앞에 대고 날개짓하며 그렇게 말하고 달아났거든요. 우리말로 하면 아마
도 “나, 잡아봐라”라는 뜻인 것 같대요….
또다른 여자 아이는 율라입니다. 열 살쯤 되었고, 우리로 치면 초등학생인데, 엄
마와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모스크바로 이사한답니다. 엄마는 의사인데, 아주
젊은 엄마라서 결혼한 것 같지 않았지요. 이 아이도 우리 일행의 말벗이 되었습니다.
말벗이 아니라, 사실은 눈벗(?)이 되었지요.. 왼쪽 사진에 있는 애가 율라입니다. 같
이 찍은 사람은 우리 일행이지요… 율라 엄마가 아닙니다… ㅋㅋㅋ
러시아 애들은 모두 정말 깜찍하고 예뻤어요.. 사람들은 귀여운 인형이라도 보
는 것처럼 아주 예뻐했지요… 어릴 때 가지고 놀며 정을 주었던 서양 인형 미미
와 나나가 환생한 것처럼 반가워하대요… 그걸 보면 우리네 마음 속에는 백인
에 대한 부러움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대요… 그렇지 않으면 어릴 때부터
우리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편견에 세뇌되었던가…
기차를 타고 느낀 것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르쿠츠크 쪽으로 갈수록 농촌이 좀
더 풍요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서쪽으로 갈수록 지붕에 텔레비전 안테나도 있
고, 동쪽에는 오래되어 칙칙한 집들뿐이었는데, 도시쪽으로 가니 새 나무로 집
을 짓기도 하였지요. 초원에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도로에는 차도
지나갑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서울 쪽으로 갈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드러
나는 셈이니, 거기나 여기나 자원이 수도쪽에 집중되는 모양입니다.
또 한 가지… 기차를 타고 가며 생기는 각종 쓰레기는 기차 창문을 열고 아무
데나 버리면 됩니다. 빈 병은 화장실 앞쪽 빈 박스에 넣어 놓으면 승무원이 따
로 모읍니다. 똥오줌은 화장실에서 그냥 철로로 쏟아 냅니다. 그래서 정차 중에
는 화장실을 쓰지 못하도록 잠급니다.. 우리 일행 중 마음 약한 분들은 생활 쓰
레기를 승무원에게 주지만, 승무원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버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시베리아
를 플라스틱, 비닐 봉지, 음식 찌꺼기로 오염시키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으나, 아
무 데나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버리는 맛이 아주 통쾌했습니다… 언젠가 러시아
가 부자가 되면 쓰레기를 치우겠지요… 우리 나라도 기차에서 철로로 쏟아내던
똥오줌을 따로 모아 치우기 시작한 것이 얼마 안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정차
중에는 화장실을 못쓰게 합니다.
기차 여행 마지막 몇 시간 전에는 기차가 여섯 시간 가까이 바이칼 호수를 끼고
돌았습니다… 바이칼 호수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지요… 마치 바다
인 것처럼 파도가 쳤습니다.. 기차를 타고 자욱히 물안개에 젖어 있는 호수를 보
며 우리들은 조용해졌어요… 자작나무 숲만 끼고 사흘내내 달려오다가, 툭 터
진 호수를 본 것이지요.. 원래 인간의 고향이 물이라고 하더군요… 엄마 뱃속
에 있을 때도 물에 떠있지요…. 그래서인지 물은 사람을 끌어안는 묘한 마력이
있지요… 빗방울까지 후드득거리며 차창을 때렸습니다… 기차 여행의 끝자락
에 내리는 빗방울… 사람들은 빗줄기 사이로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승무원이 하차에 대비하여 시트와 비품을 점검하였습니다. 여행 한 자락을 매듭
짓듯이, 우리도 인생을 때로는 확실하게 하나씩 매듭지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
다….. 새 날에는 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불사조처럼 매번
새롭게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르쿠츠크에는 밤 11시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아 가이드로 나
선 정 선생님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무심히 따라 갔습니다. 러시아 식당
에서 한식 비빔밥을 먹었지요. 기차에서 간이 식사로 찌든 배였는데 오랜만에 제
대로 된 밥을 먹어 속이 편해 졌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들어오니 새벽 한 시…
저녁을 먹은 것이 아니고, 밤참을 먹은 셈입니다… 숙소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들은 무얼까요? 여기저기서 밤새도록 샤워 물소리가 나더군요..
사흘 동안 기차 바람에 쌓이고 술에 찌든 때들을 벗겼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