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 – 매스미디어로 지배하는 사회
매스미디어로 지배하는 사회
양익순(목포고 3)
(1) 노비나 천민, 농민, 양반은 조선 시대의 사회계급의 형태이다. 조선 시대 최상위에 속하는 양반의 지배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시대 지배층들의 대중에 대한 권력 행사는 직접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물론 조선 시대의 사회 계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도 지배층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대중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없는가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 현대 사회에서도 소수의 권력가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대중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단지 지배력 행사 방법이 간접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2) 매스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진 현대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는 미디어가 권력에 의한 대중 지배를 수월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소위 사회 지배 계층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여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간다. 정치가라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대중들의 관심과 시선을 정치나 사회 전반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집중시켜 대중의 관심 분야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이 결국에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권력가들이 원하는 대중은 자신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는 사람이다. 그 결과 그들은 대중들에게 한정되고 부분적인 지식만 제공한다. 우리는 종종 같은 사건을 신문사들이 다르게 보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가 권력자들에 대한 정보 조작에 해당한다. 각기 자신의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에게 신문사들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
(3) 위와 같은 권력자들의 대중에 대한 지배력 행사에 우리는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만 한다. 우선 권력가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포장해 대중들에게 전달할 때 우리는 그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만 한다. 그래서 미디어가 권력가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속이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 전반 및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해야만 한다. 대중의 관심 영역을 축소시키고 조작하려는 정치가들의 음모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될 때 그 사회는 소수 권력가들에 의해 통제되어 버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의 의지나 주장을 사회에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는 주변의 수많은 정보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모든 정보가 사실인 것은 아니며 잘못된 정보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마련이다. 이것 역시 대중에게 제공할 정보를 인위적으로 가공하거나, 부분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려는 권력가들의 횡포이다. 우리는 주체적 판단 능력과 정보를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이러한 권력가들의 행위에 대응해야 한다.
(4)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현재 지식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 우리는 20:80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으며 실제로 미래에는 20 중에서도 더욱 소수의 인원이 사회를 주도하여 엘리트 사회에서 다원화 사회로 변한 것이 다시 소수 엘리트의 사회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다원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소수의 지배층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지배 계급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들이 대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방식에는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현대 사회 역시 소수의 권력가들이 미디어라는 수단을 통해 대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대응 방식에 따라 권력의 예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대중들에게 주체적인 사고와 냉철한 이성이 요구되는 때이다.
-강평-
양익순 학생은 글 전체를 네 단락으로 구성하였다. 서론인 첫째 단락에서 양익순 학생은 옛날과 오늘날의 지배 차이를 직접과 간접으로 구별하였는데, 그 기준 또는 구체적 예를 제시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단정하였다. 논술글 서론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상대방도 공감하고 동의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서론에서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필자와 독자가 서로 공유하고 출발해야 한다.
본론 1인 둘째 단락에서 권력에 악용당한 매스미디어의 부작용을 설명하지만 너무 막연하고 모호하였다. 가령 정치인이 이미지를 포장하여 지배력을 강화한다거나, 정치인에게 시선을 집중시켜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상대방을 이해시켜 설득하는 것이 논술글의 목적이므로 이런 답안은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한다.
따라서 예시를 이용하여 어떤 경우, 어떤 사건을 거론하여 어떻게 자상하게 설명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버릇은 그 뒤에 있는 본론 2에서도 드러났다. 대응 방식으로 세 개를 거론하였지만, 안목을 키우라든지, 적극 참여하라든지, 선별적 수용 능력을 기르라는 것이 모두 선언적일 뿐이다. 이것은 공부를 잘 하려면 ‘잠을 덜 자고, 열심히 외우고, 부지런히 풀어보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논술글에서 독자(채점자)는 항상 구체적인 근거를 요구한다.
결론 단락 첫머리에서 미래 사회도 소수가 주도할 것이라며 20:80을 거론한 것은 참신하였다. 그러나 그 뒷부분은 이미 앞에서 거론한 서론과 본론을 요약한 것이라서 뻔한 내용이었다. 차라리 20:80 양상이 확실히 드러난 사건을 하나 소개하고 그 부작용의 현대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런 부작용을 바로 잡지 못하면 어떤 후유증이 일어날 것인지를 전망하면서 끝내는 편이 무난하였다.
양익순 학생은 한 단락을 깊이 있게 정리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처럼 문제점(원인) – 대책(방안)을 정리해야 하는 글은 먼저 문제점(원인)을 찾고 대책(방안)을 마련한 다음 서론과 결론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서론부터 구상하여 서론에서 지나치게 원고지를 낭비하면 정작 본론에서 써야할 내용을 충분히 거론하지 못한다.
또 대책(방안)은 본론에 놓았어도 성격으로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이런 글은 결론 단락이 그리 길지 않아도 되는데 뭔가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양익순 학생처럼 앞에서 한 이야기를 요약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본론 원고량이 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