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 –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이미경(상명고 2학년)
하버드, 스탠포드, 예일. 이것들의 공통점은 세계에서 내놓으라하는 수재들만 모인 대학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이 있고, 이곳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피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사회에서 배운 사람, 무언가를 아는 사람으로 대접 받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들이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많이 배우고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겠지만, 그들이 안다는 것이 앎의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를 이용해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여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는 이 연구를 위해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인 결과, 이렇게 위대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관찰과 연구, 분석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된 것이다. 과학에서의 앎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관찰과 연구, 분석을 통해 얻은 지식을 말한다. 과학의 탐구 과정을 관찰, 문제 제기, 실험 설계, 실험, 자료 분석, 결론 도출의 순서로 설명하는 것도 과학에서의 앎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앎에는 깨달음의 앎도 있다. 깨달음이란 단순히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깊이 생각해보아도 쉽게 얻기 힘든 진리나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철학에서의 앎에 가깝다. 이것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진리를 깨우친 석가모니의 깨달음이다. 깊은 사고와 성찰이 필요하고 때로는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요구되기도 한다. 철학자들이 평생을 철학에만 매달려도 그것을 완전히 알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야 말로 가장 심오한 앎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앎이라는 것은 어는 분야에 정통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느 분야에서만큼은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야의 권위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에서의 앎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과학 분야만이 아닌 여러 분야에서 적응될 수 있는 더 넓은 개념이다. “그 분은 경제학을 아시는 분이셔”나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부모님이시다”처럼 다양한 경우에 쓰일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에서의 앎은 그 중요성의 높게 평가된다. 그것은 과학 지식을 기초로 하여 사회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깨달음으로서의 앎이 더 중요하다. 이성적이고 딱딱하기만 한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사람들에게 예전의 따뜻함을 찾아보기 힘들고 인간 관계는 메말라만 간다. 깨달음은 사람들을 사색하게끔 하고,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절대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지켜줄 것이다.
속담 중에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이든 많이 보고, 듣고, 느껴서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 저기 여행도 다녀보고 책 속에서 길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알게 된 지식을 통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는 급변하는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럽다고만 느낄 것이다.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깨달음으로서의 앎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강평
이미경 학생은 글 전체를 여섯 단락으로 구성하였다. 이 논술글을 서-본-결 형식 단락으로 구분하면 첫째 단락이 서론이며, 둘째에서 넷째 단락까지 본론이고, 끝 두 단락이 결론이다. 끝 두 단락을 결론으로 보는 것은 본론에서 아는 것(앎)을 셋으로 나누어 언급한 뒤, 끝에 와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미경 학생은 ‘사람은 깨달음으로서의 앎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논지를 펴기도 어렵다. 체벌 찬반 문제처럼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장단점을 비교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삶에서 양 극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즉, 식생활을 고기 먹기, 야채 먹기로 나누고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필자가 야채 먹기를 결론으로 잡는다면 고기를 먹는 것에 어떤 단점이 있으며, 야채를 먹는 것이 왜 좋은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논리를 위한 논리, 억지 논리를 늘어놓게 된다. 따라서 논술글을 쓸 때는 어떤 결론으로 글을 쓸 것인지 좀더 신중하게 검토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 글은 ‘사람은 이런 저런 앎을 두루 조화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했다.
또 이 글은 통일성을 잃고, 서-본-결 단락이 따로 논다. 결론을 ‘깨달음으로서의 앎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으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결론 앞쪽에서 자세히 언급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글 본론에는 이런 앎이 있고, 저런 앎이 있다고 늘어놓았을 뿐이지, 그 중에서 왜 깨달음으로서의 앎이 현대인에게 중요한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 결론 단락에 있는 ‘인간을 사색하게 하고’와 ‘급변하는 사회에 쉽게 적응’이라는 말을 본론 1단락, 2단락의 기본으로 삼아야 했다. 말하자면 이미경 학생은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본론 내용을 결론 단락에서 슬쩍 언급하고 지나쳤다. 본론에서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내용으로 따지면 ‘세상에는 이런 저런 앎이 있다’는 서론이었다. 말하자면 이 글은 구조적으로 큰 줄기를 제대로 잡지 못해 실패한 글이다.
많은 학생들이 서론에 담아야 할 내용을 이처럼 본론 구역까지 침범하여 언급한다. 이미경 학생처럼 본론 단락에 서론에 해당되는 현상, 실태를 장황하게 서술한다.
제시문을 수험생에게 제공하는 것은 수험생이 논술글을 쓰며 참고하라는 것이며, 그 제시문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를 각자 소화하여 자기 글에 반영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험 문제에서 조건을 주고 특별히 지시하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요약하거나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이런 글버릇을 고치려면 수험생은 글을 구상할 때 맨 먼저 글 전체의 결론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이 시험 문제에서 요구하는 방향과 일치하는지를 검토한다. 그런 뒤 그런 결론을 잡게 된 근거를 구상하여 본론으로 삼아야 한다. 근거가 두 개면 본론이 두 단락이고, 근거가 세 개면 본론이 세 단락이 될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어떤 내용으로 글을 시작할지를 구상하여 서론으로 삼는다. 서론에서 거품을 줄여야 본론 구역을 침범하지 않고, 본론 구역을 확보해야 풍성하고 깊이 있게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잡고 본론, 서론 순서로 글감을 구상하여 큰 줄기를 완성해야 비로소 깊이 있게 확장하고 논의를 본격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서론 글감을 맨 나중에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일성을 유지하며, 글감을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채점자가 요구하는 결론도 아니고, 그 방향을 제대로 뒷받침하는 본론이 아닌 것은 아무리 풍성하게 서술해도 기본 점수조차 받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