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례가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면…-강혜원

제 목
결례가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면…-강혜원
작성일
2001-04-5
작성자

이름 : 강혜원 ( ) 날짜 : 2001-04-05 오전 1:44:47 조회 : 171
참고 주소 : soback.kornet.net/~norae/

아래 글은 제가 자주 놀러가는 강혜원 선생님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 주옥 같은 글을 쓰시는 강선생님 글을 모두 보고 싶은 분은 위 주소로 가보세요.. 추천사이트 국어 교사방 목록에도 있습니다. (한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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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잡지에서 영화 배우 박중훈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는 ‘양극단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배우만 그러랴. 세상 모든 사람이 또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순결한 이상과 냉혹한 남루한 현실 사이에서,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사는 게 아닐까.

인터뷰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관객이 나를 버릴 때까지 남아서 연기하는 것은 결례”라는 말을 남긴다. 아하. 갑자기 뭔가가 나를 쿵 때리는 것같은 충격에 빠지고 만다. 어떤 사물을 볼 때, 책을 읽을 때, 자연을 만날 때마다 나의 직업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 부분은 ‘학생들이 나를 거부할 때까지 남아서 가르치겠다고 버티는 것은 결례’라는 문장으로 바뀌어서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언제 내가 교사라는 직업, 보람과 좌절감, 희망과 절망의 줄타기에서 내려와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일단 나의 머리 속에서는 물리적인 나이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다가 나이와 상관없이 뜨거운 열정으로 아이들과 호흡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래, 그런 계산법은 틀렸지.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학교에 발을 디뎠을 때, 아이들과 주고받던 그 풋풋한 사랑을 생각했다. 그 시절, 첫사랑의 달콤함 같은 게 아이들과 나 사이에 있었다. 방학이면 수십통의 편지에 답장을 쓰고, 몸살이 날 정도로 개학을 기다렸지.

시간이 흘렀다. 단지 나이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던 시절은 갔다. 여전히 아이들은 소중하고, 나는 날마다 내 사랑을 반성한다. 그러나 젊음 하나로 아이들과 통할 수 있었던 시절의 그 무엇(그 무엇이 무엇일까?)은 찾을 수가 없다. 세월도 달라졌지만…

생각은 또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언제인가? 결례가 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면…더 이상 노력할 수 없는 때가 아닐까? 애정의 힘이 바닥 나고, 내가 내 역할을 할 수 없는 때, 아이들이 내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때…. 아니 그런 때가 되기 전에 떠나야겠지. 아니 그게 대체 언제란 말인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생각했다. 교육부에서 정한 정년에 맞춰…지금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보다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아쉬움과 후회들이 밀려온다. 남은 시간들 동안 다 만회할 수 있을까? 못다한 것들을…

나는 질문을 바꿔본다. 관객은 왜 배우를 떠나는가?
볼 것이 없어서다. 그가 연기하는 세상에 대해 실망하기 때문이다. 타성에 젖은 배우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배우를 통해 보여지는 인생이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떠나지 않은 것이 결례가 아니라 그런 나태함이 바로 관객에 대한 결례이다.

나는 질문을 바꾼 뒤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그런 말을 던진 인터뷰 속의 박중훈을 다시 본다. ‘숙명적 에너지’10여년 배우 생활의 연륜’이라는 기자의 표현에 눈길을 주면서…숙명적 에너지, 숙명적 에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