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남의 누드 사진 세계-전규완

제 목
이창남의 누드 사진 세계-전규완
작성일
2001-05-11
작성자

이름 : 전규완 ( ) 날짜 : 2001-05-11 오후 1:37:08 조회 : 253
첨부 파일 : image13.jpg (30087Byte)

image13
누드는 대체로 두 가지의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하나는 자연의 대상물 중에서 인간의 미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관습적인 세계에서 해방되어 자연으로 복귀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시도하는 예술행위이다.

따라서, 누드는 인체의 형태미나 자연미 등을 내용으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에서 인간이 자연의 하나임을 인식시키고, 디오니소스적 해방감과 도취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드는 호숫가나 냇가, 언덕이나 바위 위 또는 틈새, 아니면 숲속이나 잔디밭, 혹은 목장 등 여러 자연물에 융합시키거나 풍경 속에 동화시키면서, 인간의 형태미를 창출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인체의 아름다움은 아폴론적이거나 비너스적이다.

그러나 누드는 그 어느 것이든 직접적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사진이 카메라의 사실적 묘사성이라고 하는 메카니즘적 특성을 숙명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드를 찍는 사진가들은 이 관능적 감각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상하게 비틀린 자세라든가,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있는 시선이라든가, 부자연스럽게 가리고 있는 손 등, 웬지 찍는 사진가 스스로가 수줍음을 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누드에 익숙지 아니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러한 경우는 흔히 목격되고 있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을 세속적인 관능과 혼동하여서 죄악시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에로티시즘은 인간 실체의 일면을 승화시킨 예술적 표현의 하나요, 예술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체험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는 그 에로티시즘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한 작가의 의식이 어느 만큼 본질적 표현에 충실하느냐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창남의 누드는 이러한 테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는 누드의 일반개념에 대한 리액션(Reaction)을 기초로 하여 누드의 개념을 외연적(外延的)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드 사진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을 승화하기 위해선 강한 이미지의 형상화나 이데아(Idea)의 개입이 필요하다. 강한 포름으로 형상화하여 성공한 예를 빌 브란트(Bill Brandt)에게서 볼 수 있으며, 메시지를 담은 누드로서 에로티시즘을 승화시킨 것으로 50년대의 윈 벌록(Wynn Bullock)의 누드에서 볼 수 있다. 윈 벌록은 현저한 관념의 감정이입(Empathy)을 성공시킴으로써 누드의 관능성을 내면적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이창남의 사진에서 관능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것은 그의 누드가 메세지를 담고 있는 강한 형상성과 영상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드를 주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때론 빌 브란트(Bill Brandt)와 같은 형상미를 보이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제리 웰스만(Jerry Uelsmann)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지만, 전혀 궤(軌)를 달리하고 있다.
—————–

이창남 작가의 전 작품을 감상하거나, 구입하시려는 분은 “추천사이트”에 가거나 이 주소(http://leephotonude.com/index.htm)로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