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락전자 장병화 회장

제 목
인터뷰-가락전자 장병화 회장
작성일
2013-09-3
작성자

인터뷰 – 장병화 가락전자 회장

- 장병화 회장은 30세에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를 만들면서 1977년 경일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차린다. 그 후 오늘날 가락전자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음향기기 전문인으로 산다. 그러나 자수성가한 독립운동가 후손 기업인으로 더 유명하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안 했으면 잘 먹고 잘 살 사람들이에요.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가난뱅이라서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에요. 그 당시 배운 사람들이고 집안이 괜찮은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 완전히 밑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에요.
아버님은 열아홉 살에 중국 상해로 가시어 나중에 이청천 장군 휘하 독립군에 계셨어요.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셨고, 1946년 나이 서른 살에 어머니와 결혼하시어, 그 다음 해 제가 태어났어요. 625때 성북동에 살았는데, 피난을 못 갔대요.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한다고 방송하였으니까요. 속아서 피난을 못 간 거죠. 그런데 지방 빨갱이가 밀고하여 인민군이 공무원, 지식층을 죽일 때 성북 경찰서 뒤 돌산에서 총살되었다고 해요.

- 장이호(張利浩) 선생은 1917년 신의주에서 나셨다고 보훈처에 기록되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이었으며, 한미 합작 국내 유격전 계획에 참여하여 전략 특수(OSS) 훈련 대비 교육을 받다가 조국 광복을 맞았다.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 뒤 태어나, 열아홉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상해로 갔으니, 나라 사랑이 아주 큰 분이었다.

아버님이 귀국 후 나라에서 적산 가옥을 줘서 잠깐 살았대요. 국가에서 운영하던 철도청에서 일했다고도 하구요.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못하게 하니까, 독립 운동하신 분들끼리 몰래 만나 한국독립당 일을 한 거 같습니다. 광복이 되었는데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상황에서 사찰 형사들이 유공자들을 일거수 일투족 감시했다는군요. 김구 선생님과 가까운 사람들은 전혀 활동할 수 없었어요.

14후퇴 때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친정인 강릉으로 갔어요. 그래서 강릉 외가에서 자라죠. 고생이 심했어요. 바닷가 동네에서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지요. 외가 도움을 받았지만,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죠. 그러다 열아홉 살 때 홀로 서울에 왔는데, 기술이 없으니까 취업이 안 되죠. 뭘 할까 고민하다가 서울 종로에 한국 텔레비전 학원이 있었어요. 거기서 기술을 배웠어요. 그런 쪽으로 소질이 있었고, 관심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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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이호 선생은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나중에라도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것이다. 전쟁 통에 친일파 세력이 공산주의자라고 누명을 씌워 독립운동가를 살해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런 왜곡된 현실이 독립유공자 가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장병화 회장은 그 상황을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처절한, 삶에서 고통의 연속이었다. 감자와 밀가루, 우유가루, 쑥, 칡뿌리, 보리 등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으니 언제나 배가 고팠고, 배를 불리는 것이 소원이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래도 어린 장병화가 60년대 트렌드인 텔레비전 기술을 선택했다는 것이 대견하다. 시대를 멀리 보는 눈이 있었다.

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구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 호마이카 전축이 막 유행하던 시절인데 독수리표 전축, 별표 전축이 있었어요. 그런 회사에 들어갔어요. 무지하게 잘 나가던 회사였죠. (맞다. 전축이 그때는 결혼 혼수품이었고,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었다.) 거기서 기술을 제대로 배웠죠. 서른에 창업하게 된 바탕이 된 거죠.

제가 처음에 만든 것이 오디오 믹서에요. 그 당시 일본제, 외제 믹서뿐이었는데, 국산 최초로 만들어 전국 다방에 다 들어갔어요. 그때는 음악 다방이었는데, 유명한 디제이들 채은옥, 홍민, 이장희 같은 사람들이 다 제 믹서를 썼어요. 명동 또또와 다방, 청자 다방도 그렇고. 청계천 조그만 공장에서 직원 두세 명과 만들었어요. 나중에 부천 송내동에 공장을 짓고 들어왔죠. 서흥 캅셀 뒤쪽이었는데 지금은 거기가 다 주택가가 되었어요.
가끔 어머니가 강릉에서 우리를 키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우리가 강릉에서 안이하게 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에서 자랐다면 뭔가 잘 되지 않았을까요?

- 아니다. 그때 어머니가 서울을 버리고 강릉에 간 것은 잘한 일이다. 남편 없이, 주먹에 쥔 것 없이 두 아이를 잘 가르치기는커녕 제대로 먹이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잘못되기 쉬웠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가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말처럼 장병화 가족은 서울 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강릉에서는 풍요롭게 자라지 못했으나, 반듯하게 자랐다. 어린 장병화를 나중에 쓰려고 역사의 물줄기에서 운명은 장병화를 약간 빗겨 놓았다. 꼭 그 자리에서 죽어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건강하게 기업을 운영하는 표상이 되었다.

하기야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기 온 거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 있네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2세에게 남겨놓으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재산이 없으니 2세들이 제대로 교육을 못 받고, 기득권 세력이 아니니까 나라에서 도움을 못 받았어요. 최근에 들어서야 보훈법이 생기면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나마 우리 때는 없었구요. 지금도 그거 받아서 겨우 사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는 어머니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컸어요. 우리한테는 그것뿐이었죠.

- 독립 운동하느라고 부모가 물려준 것이 없고, 그나마 아버지는 안 계시다. 그런데도 국가는 유공자 자녀라고 도와주는 것이 없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장이호 선생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덜 힘들었는지 모른다. 독립군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60년대, 70년대에 들어 부쩍 감시당하고 탄압받느라고 어린 장병화 삶에 아버지가 걸림돌이 되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독립군 출신 장준하는 1975년에 살해되며, 5남매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검은손이 은밀하게 취업을 막아서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살아 계셨다면 그 당시 정권에 협조했을 리가 없어요.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던 일본군 중위가 대통령이 되고,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에서 독립군 출신으로서 당연히 협조 안하죠. 1945년 귀국 후 그대로 다 뭉쳐 있었대요. 이청천 장군과 모여서 찍은 기념 사진도 있더라구요. 그 독립군이 우리 국군과 정부의 모태가 되었어야 해요. 그렇지 않아서 엉뚱한 사람이 별을 달고 대통령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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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전자는 30년 넘게 기숙사, 아파트, 병원, 연구소, 과학기술원, 강당 같은 곳에 쓰는 대형 방송 앰프와 음향 장비를 파는 회사였다. 말하자면 기업을 상대로 하는 음향기계 제작사이지, 오디오와 엠피쓰리처럼 일반대중과 친숙한 물건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락전자가 변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상품을 직접 판다.

맞습니다. 일반 대중과 친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좀 바꾸려 해요. 대중들과 가까이 갈 수 있는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나갑니다. 또 회의실 같은 곳에 필요한 음향 장비를 장기간 빌려주기도 합니다. 나중에 필요 없다면 도로 가져오고요.

이렇게 바뀐 동기는 아들이 삼성전자에 근무하다가 가락전자 후계자로 회사에 왔기 때문이에요. 아들이 오면서 인터넷 사업, 리스 사업 아이디어를 낸 것이죠. 우리 세대와 다르더라구요. 소리 크기에 맞춰 물이 올라오는 분수 스피커도 만들고, 휴대폰에 블루투스로 연결하는 스피커, 공원과 정원에 놓는 돌 모양, 버섯 모양 스피커도 만들었어요. 그걸 아들을 비롯하여 젊은 친구들이 진행하는 겁니다.

- 어? 회장님 아들이 가락전자 후계자라고? 2006년인가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여 가락전자를 100년 장수기업으로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때 몸이 안 좋아 수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 회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신 건가?

자녀가 가업을 이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2007년 창업 30주년에 전문 경영인을 뽑았어요. 상당히 공들여서 뽑았고 2년간 맡겼죠. 그런데 중소기업은 전문 경영이 잘 안되더라구요.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대기업 경영과 중소기업 경영이 달라요. 중소기업은 경영자 하나가 잘못되면 그날로 문 닫아요. 더구나 중소기업은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데리고 해요. 대기업처럼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걸 잘 꿰맞추어 가는 거거든요. 이걸 모르고 대기업처럼 경영하면 실패합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가업 승계로 가닥을 잡았어요. 셋째에게 해보겠냐고 했죠. 오케이 하는 바람에 짐을 덜었죠. 이 애도 처음에는 첫째, 둘째처럼 안 하려고 했어요. 힘들잖아요. 자기들 직업이 다 있고, 잘 먹고사는데 여기 와서 고생하는 것 싫다. 아버지 하는 거 싫다는 겁니다.

- 30년 가까이 다져온 회사를 전문 경영인이 2~3년에 바꾸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규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고 하지만, 신규 사업도 사람이 바탕이니 전문 경영인은 이것저것 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원칙을 따로 주문했던 것일까?

종사원이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종사원을 위한 기업이어야죠. 제가 그런 걸 주장하니까 다른 기업가들과 잘 안 맞아요. 성숙한 사회라면 그게 당연한 겁니다. 첫 번째는 고객, 두 번째는 근로자, 세 번째는 사장이라고 생각하고 일했어요. 예를 들어 근로자들이 먼저 와서 좋은 자리에 차를 대야 해요. 사장은 늦게 오니까 밖에 세우고요.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사장, 중역, 근로자 순이에요. 그래서 근로자들이 주차장에 차를 대기가 쉽지 않아요. 이곳 테크노파크 입주 사업자 대표를 할 때는 근로자들을 위해 북카페도 만들고, 좋은 인사를 모셔 강의도 진행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없잖아요?
솔직히 근로자들이 돈을 벌어주는 거거든요. 사장은 사업 여건을 조성한 것이지요. 근로자들이 주인의식이 있어야 그 회사가 살아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이 못 살아요. 우리 회사가 37년을 어떻게 해왔겠어요. 직원들을 믿고 직원들과 온 것이지. 내가 혼자 잘 한다고 여기까지 올 수 없죠. 우리 회사에 30년 이상 근무한 사람도 있어요. 평생 인생을 여기서 다 보낸 거죠. 가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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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구나. 다르구나. 친일파 후손 기업가들은 일본 통치자가 하던 짓을 배워 노동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군림한다. 일본에서 벗어났을 뿐이지, 노동자들은 지금 친일파 후손들에게 지배를 받는다. 국가유공자 후손 기업은 다르다. 조금씩 모자라는 사람들을 모아서 어깨를 맞대고 같이, 더불어, 함께 살려고 한다. 독립군 후손이라는 자부심이리라. 만약 그때 전문경영인이 자리를 잡았거나, 아들이 가업을 제대로 승계한다면 뭘 하시고 싶은 걸까?

할 일이야 많죠. 하고 싶은 할 일이죠. 사회 사업을 할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일도 하고, 통일 문제에도 관심이 있죠. 지금 그걸 못하고 있는 거죠. 빨리 물러서야 하는데.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 어느 사회학자는 우리 사회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혀있다고 지적하였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인질이 인질범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으면서 인질범에게 정이 드는 현상이다. 광복 후 비정상적인 사회가 지속되면서, 한국인들은 인질범인줄 모르고 친일 후손들, 또는 그 세력에게 정이 들었다. 바른길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다. 장병화 회장은 “잘못 길들여 있는 거죠. 한 세대가 더 가면 해결될는지요? 오래 가면 안 되는데. 오래 갈까요?”하며 쓸쓸해하였다.

독립투사 고 장이호 영전에 바치는 글

어둠과 울분의 시대에서 겨레의 한을 대신하는 한줄기 외로운 빛이시다. 말발굽 소리 진동하는 황진의 넓은 벌에 창연한 기개의 깃발이시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어찌 젊음의 웅지를 다하였으랴. 임이 달리시던 애환의 산이요 강이요. 아~ 시공 저편으로 임의 형상은 떠났어도 천년을 이어갈 영예이시다.

일천구백팔십팔년 시월 스무렛날
아들 병화. 병철 올림

글 한효석/사진 김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