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조윤령 (전 고리울청소년문화의집 관장)
한효석이 만난 사람 7 – 조윤령(전 고리울 청소년 문화의집 관장)
애를 업고 춤을 췄죠
누구든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해요
- 조윤령 님은 대학에서 복지를 전공하고 부천 춘의복지관, 고강복지관 등에서 활동하였다. 2005년 ‘고리울 청소년 문화의집’ 3대 관장이 되어 2009년까지 일했다. 현재는 가톨릭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2012년 12월 남미로 여행을 떠나 2013년 5월에 귀국하였다.
“사람들이 남미 여행을 물으면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그냥 갔다 온 거예요. 가족과 아무 문제도 없었고요.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1년 전부터 준비했는데, 가족들이 같이 갈 수 없다 하고, 관심도 없고 그래서 혼자 다녀온 겁니다. 혼자라서 얼마나 좋았는지. 호호호.”
- 사람들이 나이 들어 혼자 여행을 떠날 때는 지치고 힘들어서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휴대폰도 끄고 지난 인연을 단절하여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고 다짐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방향을 정하고 심신을 충전한다.
“충전하러 간 것은 아니에요. 해외에서 충전하려면 돈을 많이 가져가야 돼요. 몸고생을 하면 충전이 안 되거든요. 호호호. 근데 돈을 아끼려고 홈스테이를 많이 했어요. 공짜로 밥을 얻어먹을 수 없으니까 가사를 도와야 했죠. 자꾸 음식을 해달라고 했어요. 한국에서도 일하느라고 가족들에게 밥을 많이 안 해주었는데… 흐흐흐. 나중에 홈스테이를 떠났어요. 이러다 여기서 식모처럼 살겠다 싶어서였어요. 흐흐흐.
좋은 호텔에서 자본 적이 없었죠. 하루 3천원, 만 원짜리 숙소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화장실을 공동으로 썼어요.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지요. 짐이 항상 무겁고, 차를 12시간 심지어 20시간까지 타니까 남미 여행은 나이든 사람이 충전하고 휴식할 수 있는 여행은 아니었어요.”
– 웃음이 많아졌다. 한 마디하고 웃고, 한 마디를 하고 또 웃고. 여행이 즐거웠던 것 같은데 아주 힘들었다고? 암만 그렇게 말해도 여행을 통해 충전이 되었고, 여정이 좋았겠지. 비행기 삯만 수백만 원이나 하는 여행을 혼자 다녀와서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겠지. 충전과 휴식이 아니라면 거길 왜 갔을까?
“볼리비아, 페루, 쿠바, 멕시코를 갔어요. 춤을 아주 좋아해서 남미를 선택한 거구요. 체력이 되었으면 아마 아프리카도 갔을 거예요. 제가 2~3년 전부터 남미, 아프리카 춤을 배우러 다녔거든요. 그러면서 ‘가보고 싶다, 가보고 싶다’ 했어요. 춤은 춤추자 해서 시작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춤추고, 즐거우면 자기 표현으로 춤을 추거든요. 남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춤출까 해서 가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 춤이란 단어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의아스럽다. 춤추는 조윤령.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낯설다. 조윤령과 춤, 복지관 관장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윤령을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물론 반듯한 사람이라고 춤추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누구는 복지관 관장으로 기억하고, 누구는 춤꾼으로 기억할 수 있다. 두 모습이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윤령을 복지 전문가, 청소년 전문가로만 기억하였다.
“그렇구나. 내가 부천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억되었구나. 복지관 관장으로 일을 잘했다는 칭찬인가요? 흐흐흐. 제가 어릴 적부터 춤을 좋아했어요. 친정집이 춤을 아주 좋아합니다. 엄마 아빠가 춤을 좋아해서.. 흐흐흐. 사실 춤바람이 나서 결혼하셨대요. 호호호. 시골에 서양문화가 들어올 때 농촌 청년들끼리 농사지으며 지루박 같은 걸 배우는데 그때 두 분이 만나서 결혼했대요. 흐흐흐.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춤추는 동아리로는 딱하나 탈춤반이 있더라구요. 들어가니 탈춤반이 아니라 운동권 동아리에요. 탈춤은 1년에 한번 추고, 운동만 열심히 하고. 여름방학 조금, 열흘만 춤추고, 1년 내내 다른 거 하고. 흐흐흐흐. 그래도 그 열흘이 되게 행복했어요.”
- 푸하하! 조윤령 님은 엄마 뱃속에서도 흔들렸구나. 그렇게 흔들림에 익숙해서 춤에 대한 열정을 타고났구나. 대학에서 복지학과에 다니면서 정작 탈춤반만 열심히 쫓아다녔다니, 춤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스물 초반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키우자니, 굉장히 답답했겠지. 춤이 일상적이지 않은 한국에서.
언젠가 댄스 경연 장면을 보는데, 문득 저 참가자가 즐거울까,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혹독하게 훈련한 내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조윤령 님도 춤을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춤을 즐기려고 보러 간 것이 아닐까?
“출산 후 동네 에어로빅 장에 다녔어요. 애를 업고 갔어요. 애를 업고 춤을 췄어요. 흐흐흐. 애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미안했죠. 그러면 안가고. 그러다 또 가고… 그때 제가 복지관 청소년 담당자였는데, 그즈음 청소년 춤동아리가 막 생겼어요. 연습할 데가 없어서 아이들이 공원에서 춤추다가, 경찰한테 잡혀갔죠. 부장님을 설득하여 복지관에 춤추는 공간을 마련해줬죠.”
- 신기가 있으면 신내림 굿을 해서 풀어야 한다던데, 사람에게 ‘춤기’라는 것도 있는 걸까? 몸에 담긴 열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몸살이 나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상태. 그래서 조윤령 눈에 춤추는 아이들이 확 띄였을 테고, 그런 아이들 모습에서 자기를 보았을 것이다. 복지관 춤추는 공간은 춤추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조윤령 님에게도 해방구였으리라.
“개네들이 공연할 때 공연 기획도 해줬죠. 야근을 안 해도 되는데, 개네들 춤추는 것을 보려고 야근했어요.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무시하더라구요, ‘보시는 것으로 만족하세요.’하면서요. 나이 드는 걸 별로 싫어하지 않았는데 개네들을 보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했다니까요. 그러고도 4~5년 뒤에야,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기고 복사골문화센터에 재즈댄스를 배우러 갔죠.
1주일에 세 번씩. 너무 행복했어요. 매일 쳐다보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스물아홉 살이니까, 전문적으로 하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이든 아줌마도 아니고. 아이 낳고 살도 뺄 겸 해서 갔지만, 나하고 너무나 잘 맞더라구요.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어요. 진짜 좋았어요.”
- 그 느낌 알 것 같다. 나도 부천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교사 재즈댄스 동아리를 만들어 1주일에 한 번씩 학원에 다녔다. 어쩌다 가는 셈이라 제대로 동작을 하지 못해도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면 너무나 행복했다. 조윤령 님이 남미 여행 동안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은 모두 그렇게 행복한 모습이었다. 특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소금 사막에서 허공을 향해 뛰는 모습이 그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남미 여행 중에 어려웠던 적은 없었을까?
“여행 한 달 반만에 소매치기를 만나 돈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고산병 증세도 있었구요.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남미 가난한 사람들이 저를 막 대하는 거였어요. 동양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조용한 편인데, 남미 사람들은 아주 직설적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말로 행동으로 그대로 표현합니다. 굉장히 힘들었죠.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대하지? 한국 복지관에서 만난 어려운 사람들도 이렇게 막 대하지 않았는데.. 남편은 좀더 견뎌보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하고, 거기까지 갔으니 아까우면 쿠바로 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힘든 참에 같이 다니던 여행 친구들이 지적하더라구요. ‘조윤령, 너 그렇게 안 보았는데 이상한 소리 한다. 개네들을 왜 그렇게 보냐? 한국에서 너는 그렇게 거칠게 말하지 않았다.’라고요. 그때 막 깨졌죠. 내 밑바닥을 그 친구들에게 들킨 거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내 생각이며 치부가 다 드러났어요. 도망가고 싶고 너무나 창피하고…
한국에서 사회복지 한다고 빈민들과 같이 생활했지만, 실제로는 함께 생활한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제가 공무원이고, 복지관 관장이니까 사람들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던 겁니다. 그런 게 무너진 상태에서 남미 가난한 사람들 삶속에 들어간 거죠. 부끄러웠어요. 제가 참 오만했었어요.”
- 그럼 그렇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여행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니까. 언젠가 교무실에서 담임 여교사가 학교 부적응 여학생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일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서 사범대를 졸업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하고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여학생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지 않으면 인간 관계는 그냥 밋밋한 관계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조윤령 님은 춤을 보러 갔다가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것일까?
“춤추는 게 좀 쉬워 졌어요. 몸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남미 사람들은 몸을 가둬놓지 않더라구요. 틀이 없었어요. 몸을 잘 쉬는 충전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 삶을 잘 들여다보고 잘 느꼈던 것 같구요. 제가 비교적 자유롭게 잘 살았다고 하나, 저에게 얽매여 있던, 입고 싶지 않았던 옷을 많이 입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부분을 벗은 것은 진짜 시원했어요.
그리고 40대가 해야 할 행동, 말이 있잖아요. 남미에도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제 나이를 모르더라구요. 내가 외국 사람이라 짐작이 안 되는 거죠. 남미에서도 대부분 젊은이가 여행을 합니다. 그래서 나를 20대로 보는 겁니다. (허걱, 헐! 에이~) 남미에서는 29살로 통했어요.(깔깔깔, 하하하하) 정말이에요. 40대 아줌마가 그것도 애가 있고, 남편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돌아다닌다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남미에서도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 복지관 관장, 반듯한 조윤령, 착한 아내. 이처럼 한국에서는 조윤령 님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낯선 곳을 여행하며 그 부담에서 벗어났다. 힘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일로 만났지, 인간으로 만나지 못했다. 내려놓으면 큰 일이 날 것 같았는데, 막상 비우면 더 큰 행복이 기다린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남미에 가서 마음 비우는 법을 깨닫고 이웃을 좀더 인간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나 보다.
“내가 갖고 있는 게 이렇게 많구나 싶었구요. 앞으로도 춤을 좋아하겠지만, 죽을 때까지 춤을 복지라는 일과 연결할 거 같아요. 학교 부적응 청소년들이 춤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가잖아요? 누구든 기본은 행복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서 문화 예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크더라구요.
여행후 사람들 반응이요? 음~ 남편은 ‘다른 사람 말을 많이 들으려고 하네?’라고 하던데요. 친구들은 눈빛과 표정이 밝아졌다고 하고… 음~ 거울을 보니까 굳이 연습을 안 해도 제가 이쁘게 웃는 것 같아요. 흐흐흐”
- 그랬다. 한 시간 내내 계속된 대화에서 절반은 웃음이었다. 행복한 기운이 넘쳐서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저절로 행복했다. 복지나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것으로 본인은 행복하게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일로만 다룬다.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자기가 행복했을 때 그 기운만으로도 남들이 행복해 한다는 것을 잊고 산다. 그런 면에서 조윤령 님은 여행과 춤을 통해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생활수행, 류경미, 양순열님 외 14명이 좋아합니다.
김혜옥 조윤령관장님 멋지잖아요~^^
2013년 12월 15일 오후 5:56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2
한금희 조윤령님이 해주신 춤테라피 기억나요.
잠깐이었지만 아주 많이 웃었어요
2013년 12월 15일 오후 5:57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2
박진 어헛. ㅎ 조샘이네요~
2013년 12월 15일 오후 6:18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1
신은실 글이 참 뭐라고 해야하나~~^^ 친구랑 이야기하는 느낌~~옆에서 두 분의 대화를 직접 듣는 기분이예요 두분이 상상이 가요~~ㅎㅎ
2013년 12월 15일 오후 9:55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