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장경화 (부천시 교육경비특별위원회 위원장)

제 목
인터뷰 – 장경화 (부천시 교육경비특별위원회 위원장)
작성일
2013-11-25
작성자

한효석이 만난 사람(8) 장경화 – 부천시 교육경비특별위원회 위원장

1년에 네 번 촌지를 주어야 편했어요
저는 당신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 장경화 님은 교육 불모지였던 1990년대 부천에서 교육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학교 급식 시설 예산, 교복 공동구매, 수학여행 입찰처럼 전국 최초라고 이름 붙일 일을 이뤄낸다. 그러다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2009년에 선진당에 입당하면서 지역에 화제를 일으켰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정당에 들어가면 시선이 곱지 않죠. 그때 저는 민주당원이었어요. 2004년 원혜영 부천시장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입당을 권유했지요. 당선되려면 민주당으로 2010년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유리했어요. 여성에게 더 유리한 것도 민주당 지방정치 포럼을 통해 미리 알았어요. 선진당이 충청도당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경기도에서 지지도가 3%가 안 되었어요.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친구들이 모두 반대했구요.
그때 전덕생 전 시의원이 선진당 경기도당 위원장인데, 같이 일해보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당황하였죠. 그래도 결국 선진당에 갔어요. 선진당이 좀 허술하다고 할까, 잘 하면 선진당에서 여자들이 제대로 정치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남편이 니는 출세를 위해 일하지 않았지 않았다며 적극 찬성한 것도 계기가 되었구요.
지금 심정이요? 음~ 선진당 경기도당 대변인, 선진당 여성 국장을 하면서 넓은 세상을 보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후회하지 않습니다.”

- 당차다. 호불호가 분명하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 삶을 당당하게 선택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장경화 님은 쉬운 길을 놔두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장경화에 대해 당황하면서 개인적으로 장경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으로 분명히 나뉘는 것이 아닐까? 본인도 그걸 알까? 부천시 교육경비특별위원과는 잘 지내는지?

“일을 하면서 이익을 얻는 사람과 잃는 사람이 생기니 저를 두고 평가가 다르죠. 사회는 어떤 원칙을 상의하여 만들고 사람들에게 선택하게 하지요. 피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하면 나도, 다른 사람도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젊은 탓에 나 때문에 상대방이 불편하리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을 수 있어요. 어떤 때는 필요한 말만 들었을 수도 있구요. 그러고 보니 저도 나이를 먹었네요. 흐흐흐.
교육경비특별위원회는 제가 좋아하는 분야라서 참여한 겁니다. 부천시는 교육 모범 도시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학교에 예산을 많이 지원합니다. 그런 예산을 좀더 효율적으로 써보자는 겁니다. 다른 위원들과 잘 지내니 걱정 마세요. (푸하하, 호호호)
9월에 위원들이 3조로 나뉘어 학교에 찾아갔는데, 생각이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전에는 내 새끼라는 생각이 앞섰다면 부천 애들이 모두 우리 새끼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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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 애들을 모두 내 애처럼 보잔다. 말은 쉽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교육과 학교 문제를 구조 문제로 보기 어렵다. 대부분 자기 자녀 문제로 본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를 잘 만나야 하고, 언제나 좋은 담임을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교에서든 어떤 교사를 만나든, 아이는 건강하게 커야 한다.

“저도 애들을 키울 때는 다른 학부모처럼 교사에게 촌지를 건넸어요. 큰 시누이가 1년에 네 번은 교사에게 촌지를 줘야 한다는 거예요. 학교육성회나 어머니회에 가입하여 회비를 내고, 학교에서 교실 청소를 시키면 하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애를 괴롭히지 말라는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 오잉? 부천에서 한평생 교육 운동을 극성스럽게 벌인 사람이 알고보니 옛날에 치맛바람을 일으키던 극성엄마였다고?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교사에게 돈봉투를 건넸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제가 귀하게 컸어요. 부모님 기대가 컸고요. 호호호. 아버지가 오정동 미군부대 군무원이라서 다섯 살 때 가족이 부천에 왔어요. 그래서 부천 대장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5학년 때 서울 영중초등학교로 전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하죠. 그리고 강서여중, 덕성여고에 다녔지요. 덕성여고를 다니던 1970년대에도 겨울에 난로 불을 학교 아저씨가 다 피워주고, 나중에 스팀으로 바꿨죠. 추워하며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애가 학교를 다니는 1990년대에 부천은 겨울에 영하 2도가 되어야 빨간 깃발을 올리고 장작개비를 줘요. 불을 제대로 안 피워주니까 아이가 번개탄을 사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나마 장작개비라고 주는 나무도 폐목이에요. 나무에 못이 박혀 있어요. 이해가 안 되었어요. 같은 시대에 부천과 서울이 이렇게 차이가 나니, 애를 부천에서 키우고 싶겠냐고요? 우리는 대장동 논바닥 흙을 찰흙이라고 퍼다 주는데, 서울은 학교 앞 문방구에 준비물이 다 있어요. 애를 부천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지요.”

- 부천을 되게 싫어했구먼.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며 못 볼 걸 봤다. 개인 문제가 아니라 여건과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세상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넓은 세상을 본 사람은 좁은 세상을 못 견뎌 한다. 그러니 부천에 정이 안 붙을 수밖에. 그런데 결국 애 둘을 부천에서 키웠다.

“월세 방이라도 얻어서 서울로 이사 가고 싶었죠. 그런데 큰 애가 5학년 때였을 거예요. 서울 성수대교가 무너지면서 통학하던 학생들이 많이 죽었어요. 이러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들에게 원망을 듣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다른 이유는 큰 아이가 자기는 서울로 가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사하면 자기는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지만, 아픈 할아버지를 버리고 가야 되지 않냐는 겁니다. 그게 마음이 안 편할 것 같다고요. 애를 잘 키우는 목적이 학벌을 높이거나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좋게 키우는 거잖아요? 그 소리를 딱 듣고 그동안 제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애들이 어른 공경하는 것을 배웠구나 하는 생각에 서울로 가는 것을 포기했죠. 그게 내 무덤이 되었어요. 지금까지 30년 넘게 시어머니와 삽니다. 호호호.”

- 자기가 잘되는 것은 좋지만 할아버지가 불편해지는 것이 싫다. 큰 아이는 어리지만 속이 깊고 심성이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장경화 님은 그 대목에서 울먹였다. 꿈많은 소녀가 스무 살에 남자와 연애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시댁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한다.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있어 시어머니 대신 학부모 자격으로 학교에 드나들고, 자기 애를 키우기 전에 시동생을 키운다. 장경화는 그런 운명을 버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사실 시부모와 10년쯤 살았으니까 아이를 핑계로 시댁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 아이에게 그런 속내를 들킨 것이리라. 그리고 그때 시부모를 못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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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큰 애 담임, 작은애 담임에게 촌지를 줬어요. 어머니 회비, 체육진흥회 회비를 냈고요. 그런데 서울로 전학을 안 시키니까 학교에서 하는 일이 못마땅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언젠가 떠날 거니까 대충 넘어갔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불법으로 회비를 냈지만 학부모 대표가 결산도 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더군요.
제가 체육진흥회 부회장이었는데, 그때는 체육대회를 하면 돈을 걷어 선생님 체육복을 사주고 운동화와 모자 사주던 시절이었어요. 엄마들도 교사와 똑같이 옷을 입고 설쳤어요. 제가 그거 하지 말자고 했어요. 세 개 사줘야 하는 걸 하나만 사주고, 임원 엄마들은 안 입거나 색깔이라도 달리 입자고 하며 조금씩 바꿔나갔죠. 그거 완전히 없애는데 3년이 걸렸어요.”

- 와~ 그런 저력이 있었다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지역 사회에서 장경화는 고집 세고, 말 많고, 독선적인 사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젊은 엄마가 그것도 3년을 두고 관행을 바꿀 만큼 사람들을 끈기있게 설득하다니, 놀랄 일이다. 어쩌면 지금 모습이나 그때나 같다.

“운영협의회가 1995년인가 생겼는데, 5학년 선생님들이 6학년 대표 엄마로 저를 뽑았어요. 그리고 체육진흥회 부회장, 운영협의회 부회장으로 초등학교 급식 시설에 관한 공청회에 참여했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급식 후원회를 구성하여 학부모에게 돈을 걷으려고 했어요. 저는 덕산초 급식 후원회장이었는데, 돈을 걷지 않고서 나랏돈으로 밥을 먹일 수 있다고 학부모들을 설득하였어요.
그래서 36개 초등학교 후원회장단 모임에서 초등학교 구별 공동대표가 됩니다. 그리고 최옥정, 지성수, 임해규, 최순영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급식 시설비 마련을 위한 학부모 연대’를 만들었죠. 처음으로 지역에 눈을 돌리면서 부천 교육 운동을 시작했죠.”

- 그때 안산시와 대전 유성구 지방자치단체장이 파격적으로 예산을 지원하여 화제가 되었다. 부천에서는 안 해 주었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태어난 셈이다. 그래도 그런 활동이 오늘날 교육경비 마련을 위한 제도로 발전했고, 무상급식의 실마리도 되었다. 어쨌든 3년 만에 부천시도 조례를 만들었고, 그 뒤 모든 초등학교에 급식 시설을 갖추도록 경비를 대주었다.

“막상 일이 끝나고 그 분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천시 학부모회’를 만들었어요. 전국적인 학부모 단체가 있지만 지역 문제는 무시하더라구요. 우리는 중앙보다 지역 현안을 다루자고 모였어요. 그리고 민원을 받았어요.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다치거나 교사에게 맞아서 문제가 되었을 때, 힘없는 학부모를 대변했지요.
그러다 학교운영위원회가 탄생하면서 ‘부천시 학부모회’가 참여하여 ‘학교운영위 정착을 위한 부천시민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요. 1998년에는 ‘부천시민모임’을 해체하고 ‘부천교육연대’를 만들었는데, 김대중 정부에서 ‘부천교육연대’가 교육공동체 모델이 되어,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전국 지역마다 ‘새교육공동체’를 만들지요.”

- 체구는 작지만 반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을 통해 저력이 쌓이면서 지역 교육 풍토를 바꾸고 전국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들어 뜬금없이 뷔페집에서 일을 한 것은 어찌 된 일인지?

‘애들이 크니까 시간 여유가 있었고, 제가 대학을 중퇴하고 결혼하면서 친정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을 속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2004년에 성공회대에 입학하였죠. 물론 좀더 전문가가 되고 싶었구요. 작은 아이도 그 해에 대학에 입학하여 집안 경제 사정이 아주 많이 어려웠지요.
대학 동기생 젊은이들 밥사주는 것을 남편 돈으로 쓰기도 그랬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뷔페집에 가서 일을 하였어요. 뷔페집에서 돈도 벌고, 동네 사람도 만나고, 지역 유명인사도 만납니다. 그 사람들에게 외국에서는 접시 닦으며 공부하면 칭찬을 받는데, 국내에서도 그래야 되잖냐고 말했어요.
거기서 많이 배웠죠.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주중에는 학교 급식소에 다니는 엄마가 주말에 뷔페집에 일하러 나옵니다. 아주 굉장히 치열하게 살아요. 저도 열심히 살았지만 그렇게까지 치열하지 못했어요. 충격을 많이 받았지요. 그때까지 몸으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호강에 겨웠지요. 거기 있는 아줌마들이 존경스러웠어요. 저를 많이 돌아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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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반대하는 사람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좋단다. 특히 50%대 50%로 만나는 것이 가장 좋단다. 그 사람을 1%만 설득하면 내 의견에 동조하게 할 수 있고, 내가 1%만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고정된 49%는 100% 반대하는 사람과 같고, 80%도 20%쯤은 동조할 것 같지만 80%를 내려놓지 못해 100% 고정된 사람과 같단다.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세상은 귀를 귀울이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게 장경화였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는 것 같으면서 사람들은 각자 딴 생각을 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장경화 님은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 의견을 존중한다.”라고 해야 옳은 세상이란다. (글: 한효석, 사진 : 김혜숙)

생활수행, Lee Woosang, 김재성님 외 12명이 좋아합니다.

김혜옥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시간 될 때 한번 더 읽으러 올께요~^^
2013년 12월 18일 오후 6:06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1

윤국재 선진당 자리 잘 잡으셨네요. 원래 가야할 곳에 가셨네.
2013년 12월 19일 오전 12:05 모바일에서 · 좋아요 취소 · 1

한효석 윤국재 쌤은 장경화 씨에게 안좋은 감정이 있나요? 어쩐지 삐따닥하게 들리네요.
2013년 12월 19일 오전 12:47 모바일에서 · 좋아요

생활수행 다름이 인정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 다름과 틀림은 다른데… 수고 많습니다.
2013년 12월 19일 오후 12:16 · 좋아요 취소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