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번호 없는 단지 -이경옥

제 목
(수필) 번호 없는 단지 -이경옥
작성일
2000-05-12
작성자

이경옥(주부, 부천시 원미구 상1동 반달마을)

가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향기로운 결실을 거둘 때마다 나는 국화꽃을 한 다
발 사서 단지(항아리)에 꽂아 놓고 친정 엄마 장독대를 생각하곤 한다.

친정집 장독대에서 제일 큰 항아리는 내 몸 두 배는 되었다. 단지 크기에 따라
내용물이 달랐다. 그런데 그 단지마다 엄마는 페인트로 번호를 써 놓았다. 1번
은 간장, 2번은 된장, 3번은 고추장, 4번은 고추 장아찌, 5번은 깻잎 장아찌…
11번은 고춧가루, 12번은 참깨. 이것 저것 많은 곡물도 단지에 담아 두셨다.

그리고 그 중 번호가 없는 단지 하나는 꽃병으로 사용하셨다. 가을 같으면 들국
화를 많이 꺾어서 번호 없는 단지에 꽂아 단지 주인을 찾게 해주셨다. 내가 왜
꽃을 꽃병에 꽂지 않고 단지에 꽂냐고 물으면 친정 엄마는 “원래 들국화 꽃은
단지에 꽂아야 멋이 있단다.”라고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학생때였다. 우리 학교에 도지사님과 교육장님이 오신다
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대청소를 시키고 교실을 예쁘게 정돈하라고 지시하였
다. 그래서 난 엄마 흉내를 냈다. 들국화를 단지에 꽂아 교탁에 올려 놓았다. 우
리 반 급우들은 시큰둥했지만 우리 교실에 들른 도지사님께서 들국화를 보시고,
들국화와 단지가 조화를 이루어 균형이 잡히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칭찬을 아
끼지 않으셨다.
나는 조화나 균형, 여유라는 말의 뜻을 몰랐다. 담임 선생님께서 도지사님 말씀
을 보충하여 설명해 주셨고, 그때서야 급우들도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 날 이후로 학교 환경 미화 때나 손님이 오실 때면 담임 선생님께서도 으레
우리 엄마 흉내를 내셨다. 담임 선생님께서 엄마 흉내를 낼 때마다 나는 속으로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엄마는 일제 시대 때 보통 학교만 다니셨다는데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하셨을까?

세월이 흘러 세상이 많이 바뀌고 그에 따라 크리스탈 꽃병, 화분병, 도자기병
등 여러 종류의 꽃병들이 유행하였지만, 지금도 엄마는 한결같이 30여 년 이상
번호 없는 단지에 들국화를 꽂으신다.

어느새 나도 엄마 삶의 반은 살았는데 이제서야 엄마가 들국화를 꽂으시는 뜻
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엄마처럼 자연스럽게 여유를 갖고 살 수
있을까? “엄마, 유리병에 장미꽃 궁합은 어떨까요?”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꽃과 꽃병에 대해 자문을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