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름다운 고부 관계 -성해숙

제 목
(수필) 아름다운 고부 관계 -성해숙
작성일
2000-06-9
작성자

성해숙(주부, 부천시 원미구 중동 보람마을)

시끌벅적, 남편과 아이들을 내 보내면서 하루 생활이 시작된다. 오전 여덟시,
여느 때처럼 텔레비전을 켰다. 주부 고민을 묻고 풀어주는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
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주부는 잘못한 일도 없는데 시어머니가 말 꼬투리를 잡
고 따지다가 심지어 때리기도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요즘 흔한 고
부간 갈등이라고 하지만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내내 안타까웠다.

나도 삼 년동안 시댁에서 살았다. 남편과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도 좋았기 때문에 결혼하자마자 시집살이에 뛰어 들었다. 남들이 다 맵다고도 하
고, 시부모와 함께 살면 어려움이 많다는 말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 있는 즐거움도 잠시. 날이 갈수록 시댁 생활은 낯설고 힘
이 들었다. 친해 보려고 말을 붙여도 대답도 잘 안 해주는 시누이들 속에서 장사
하시는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집안 일을 맡아 해야만 하는 일이 부담이 되었다.
결혼 전에는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았는데, 시댁에서는 정해진 틀 속에 꼭 끼
어 빠져 나올 수가 없어서 우울해 하는 날도 많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식구들 점심을 준비해야 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어느새 저녁 식사 시
간이 되었다. 시아버님이 계셨기 때문에 한끼도 거를 수 없었다.

그래도 저녁때 돌아오신 시어머님이 하루 내내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
다. 자상하시게 말을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시면서 과일,
생선 등을 가져 오셨는데 네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사 왔다고 하면서 손수 요
리까지 해서 먹으라고 하셨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와 시어머님과 헤어져 살았다. 어쩌다 시어머님께 안부 전화
를 드리면 어멈 건강은 어떠냐고 하면서 당신 아들 안부는 묻지도 않으셨다. 그
런 어머니 전화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나는 어머니께 해드린 것도 없는데 항상 나
만 생각해 주시는 어머님 마음에 보답할 길이 없어 죄송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몸이 아픈 시동생과 둘이서만 살게 되었다.
어머님을 뵈러 시골집에 내려가면 시동생 간호하느라고 고생이 많으실 텐데도 힘
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시고 ‘가정 잘 돌보느라 애쓴다.’며 오히려 나만 위해 주
었다. 이런 어머님을 위해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작년 겨울 시동생 병이 위독해 나 혼자 시골에 내려갔다. 그 동안 어머
님 혼자서 환자를 간호하셨던 탓에 무척 지치신 것 같았다. 나는 그날부터 어머
님 옆에서 마음이나마 편안하게 해 드리려고 아범, 손자, 손녀 잘되는 이야기,
또 시동생 시누이들이 잘 사는 희망적인 이야기만 쉴 새없이 했다.

그렇게 일 주일이 지나가고 어느 날 새벽에 시동생은 고통스런 삶을 마감했다.
어머님은 너무나 슬픈 나머지 힘없이 벽에 기대고 앉아 눈만 끔벅이셨다. 그날
은 오랫동안 뒤뜰에서 어머님 정성스런 손길에 잘 자란 감나무, 사과나무, 잡초
들까지도 스산한 바람 따라 흔들거리며 슬퍼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장사하
랴 집안 이끌어 가랴 아픈 자식 돌보랴 힘들게만 살아왔던 시어머니의 고생과 슬
픔이 이것으로 끝나기를 빌었다.

지금도 어머님은 잘못된 일은 내 탓이라 하고 좋은 일은 “네 덕분이다” 라고 하
신다. 나또한 잘못은 내 탓이라 하고 좋은 일은 “어머님 덕분입니다” 하면서 지
낸다. 고부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갈등이 서로 바라기만 하는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인간 관계는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상대방이 나
에게 잘해 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주려는 마음이 앞서면 갈등이 사라지
고 ‘아름다운 관계’만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