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갈색, 그 아름다움 – 이연진

제 목
(수필) 갈색, 그 아름다움 – 이연진
작성일
2000-07-12
작성자

이연진(주부, 부천시 원미구 상동 한아름)

나는 어렸을 때 색깔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편이었다. 주로 고동색 계통을 싫어
했는데 특히 갈색을 볼 때는 그 색감이 주는, 구정물 같은 느낌이 싫어서 언제
나 이마를 찌푸리곤 했다.

중학교 미술시간 때, 구성을 하기 위해 그림 형태를 잡고 적당히 면을 나누어
색을 칠하였다. 그런데 색의 조화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 색을 섞어 쓰다 보면 도
화지 한쪽 구석에는 언제나 갈색 빛이 드러났다. 그러면 나는 사정없이 도화지
를 구겨 책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연한 파스텔 색이나 무지개 빛 낭만을 꿈꾸
던 사춘기 시절에는 그것조차 참아 내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색에 예민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갈색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
날, 그 동안 미루어 놓았던 대청소를 할 때였다.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털
다가, 나는 우연히 십자가 옆에 꽂아둔 성지 가지를 보았다. 사순절 때 받아온
성지 가지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시들어 말라버렸다. 힘없이 쳐진 잎은
빛이 바래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서너 달을 견디지 못하고 바삭 말라 버린 잎
은 초록 땀을 빼내느라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었을까…

그러한 중에도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각과 웃음으로 시간을 흘려 보냈을 것이
다. 세상 모든 것은 사람들이 깊이 잠든 사이에도 가을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스쳐 보내며 나는 갈색이 예사롭지 않
은 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겸손이라는 것이 지고 지순한 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토록 고요
한 모습으로 오랜 시간을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마음이라는 것을 미쳐 깨닫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을 들판의 향연을 그리워한다. 빛이 바랜 듯한 갈색
은 모든 것을 순화시키는 너그러운 포용력이 있어 좋다. 가을이 돼서야 느낄 수
있는 풍성함과 여유로움도 갈색 그릇이 담아내는 열매일 것이다.

그것은 색의 혼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명도가 높은 색이나 파스텔 색,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색에 갈색을 조금만 섞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차분히
가라앉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색이 만들어진다. 또한 여러 가지 색
을 마구 섞어 보아도 마지막에는 채도가 낮은, 어두운 갈색이 나오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온 돌과 모래와 나무도 역시 갈색 빛에
서 멀지 않다. 흙의 색깔 또한 그러하다. 그 어떠한 아름다운 색도 세월을 이기
지 못하고 탈색이 된 후에는 흙으로 섞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갈색 빛으로 나서 그 색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
화가 끝난 뒤에 사람들에게는 조용히 문을 닫고 가야할 마지막 길이 있다. 모두
의 가슴에는 갈색 빛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겸손
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며,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자리이다.

빛이 바랜 갈색처럼 돌아가야 할 때는 알고,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람들의 뒷모습은 진정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