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어머니와 오천만 원짜리 복권 -신옥

제 목
(수필) 시어머니와 오천만 원짜리 복권 -신옥
작성일
2000-07-19
작성자

신 옥(주부, 부천시 원미구 상1동 한아름)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뜻밖에 시어머니였다. “뜻밖에”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시어머님은 전화를 거의 안 하신다. 내가 자주 전화를 하기 때
문일 수도 있지만…….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될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시어
머니의 전화를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평소에는 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잘 하던 시어머니는 대뜸 남편을 바꾸라
는 것이었다. 조금은 당황되기도 했지만 얼른 남편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남
편은 무조건 예, 예 소리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설거지를 하면서
도 전화 내용에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더욱 궁금하게 만든 것은 거실에서 전화
를 받던 남편이 베란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곁에 있는 전화기로 들어볼까 하다
가 모자간의 얘기를 엿듣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아, 어머님 웬일”에 “~이세요”를 하기도 전에 남편을
바꿔 달라고 할 만큼 다급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내가 듣지 못하
도록 베란다로 나가서 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직까진 이런 일은 없었
는데… 며느리와 가깝다 해도 역시 아들이 먼저구나.” 생각은 한 걸음 앞서 나
가기 시작했다.

궁금한 마음을 텔레비전을 보면서 애써 잠재우고 있었다. 전화를 끝낸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고 당장 묻고싶었지만 내게 얘기 하고
싶지 않은 일일지 몰라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있던 남편은 냉장
고에 가서 맥주를 꺼내 와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분명 있는거야.’ 성격 급한 남편이 바로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더욱 궁금하고 걱정까지 되었다. 그래도 난 ‘왜?’라고 묻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텔레비전에 시선을 두었지만 머리 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죽박죽이었다.

맥주 두 캔을 다 마신 남편은 나를 힐끔 쳐다봤다. 얘기 들어줄 자세가 다 되
어 있으니 말해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을 바라봤다. “어머니도
참…..”하면서 남편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베란다로 다시 나가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들어왔다. 난 가슴이 꽁당거렸다.

“어머니가 꿈이 좋아 즉석복권을 몇 장 샀는데 오천만 원이 당첨됐대.” 순간 걱
정됐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와, 좋겠다. 우리 어머
닌 좋겠다’고. 이런 횡재도 있다니….. 안고 있던 쿠션을 머리 위로 휙 던졌다.

그런데 내 기쁨과 다르게 남편 표정이 철없는 어린아이 보듯 나를 쳐다봤
다. “이 사람이 어머니와 똑같기는…..”하면서 얘기를 이어 갔다. 처음 사본 즉
석복권을 긁어 보니 당첨금 오천만 원 라고 써있어 너무 놀란 어머니가 큰아들
인 우리 집에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옆의 숫자가 같은 것이 있어
야 당첨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드렸단다. 십 만원짜리 복권도 몇 개가 있었다. 그
러나 결과는 모두 “꽝”이었다.

너무 놀라 큰아들에게 전화를 하신 시어머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전화로
복권을 확인시켰을 내 남편, 기쁨은 잠시 곧 실망을 한 나… 한동안 말을 잃었
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웃으면 안될
것 같은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풋..어..억…흐…하하하.’ 참다 보니 해
괴망측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웃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누구보다도 실망하셨을 시어머니가 떠
올랐다. 꿈은 핑계고 혹시 돈이 궁핍해서 복권을 사신 걸까? 난 나름대로 내 형
편에 과하게 생활비를 보내드린다 해도 부유하게 사셨던 옛날에 비하면 시어머니
는 부족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아버지도 안 계셔 넉넉하진 않을 것
이고, 통 크신 분이라 쓰임새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울적
해졌다. 그래도 큰아들이라고 가까이에 있는 자식 제쳐두고 곧 바로 전화하신 시
어머니 얼굴이 겹쳐졌다. 내일은 위로 전화를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베란다
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