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3) -신옥

제 목
금강산은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3) -신옥
작성일
2000-07-27
작성자

정을 나누고 싶었던 내 동포 – 안내원들

산을 계속 내려오니 맨 처음 만났던 남자 안내원이 ‘구경 잘 했습네까?’ 하고
먼저 인사를 했다. 반가움에 환히 웃으면서 쳐다봤다. 그 안내원은 시골에 있는
사촌 남동생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선한 인상에 새 색씨처럼 조용한 미소, 얼굴
의 주근깨까지 닮아서 손이라도 덥썩 잡고 싶었다.

또 우리 나라에선 고서로나 구분될 정도로 누런 책을 읽다 덮고, 날 바라보던
여자안내원에게도 무슨 책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말문이 열리질 않았
다. 대화 중에 실언을 할까 염려되어 간단히 몇 마디 나누고 주차장으로 내려왔
다. 뭔가를 남겨두고 온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그들이 먼저 말을 건넸는데도
난 마음을 열어보이지 못한게 후회되었다.

오직 한 군데 뿐인 흡연 장소에 모인 남자들은 몇 시간씩 참아 왔던 담배를 피
우느라 기쁜 표정들이었다. 북측 안내원도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어 보기 좋았
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북측 안내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사람
이 4월 15일이 무슨 날이냐고 계속 물었다. 누군가 금방이라도 ‘김일성 생일’이
라고 말할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우리야 아무 상관없이 존칭없이 김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을 들은 북측 안내원이 혹시라도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도 그 물음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괜히 가
슴을 쓸어 내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내게 역시 혼자 서있던 여자 안내원이 날 보고 환히 웃
었다. 우리 때문에 추운데 수고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며 금강산 관광이 어떠
냐고 물어왔다. 물도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절경이라 아름답다 했더니 무척 흐뭇
해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와 아이들은 안 데리고 왔습네까?’ 하며 큰 눈을 더 크게 떴
다. 학교 다니느라 안 데리고 왔다고 하니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학교
꽝 때려치고 데리고 와야디요.’ 하며 날 나무라는 듯한 29살 예쁜 아가씨의 목소
린 억셌다. 다음에 또 만나자며 손을 꽉 잡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복사꽃처
럼 예쁜 그녀의 수줍는 듯한 미소를 가슴에 담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버스 옆에 깔아 놓은 돗자리에서 순간 발열되는 도시락을 꺼내 소고기 덮밥을
맛있게 먹었다. 많은 것이 낙후된 북녘 땅에서 초스피드 도시락이 갑자기 대단
해 보였다. 후식으로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동
판매기가 설치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금강산이 지저분해질 것 같아
내 소망 따윈 접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산속의 차가운 바람에 어디선가
커피향이라도 실려 올 것 같아 코로 깊숙이 숨을 들이셨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온정각 휴게소 근처에 있는 온정리 온천장으로 향했다. 멀
리 인공기가 걸려 있는 회색빛 북측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12달러를 내고 들어서니 깨끗하고 확 트인 넓은 온천장엔 다양한 기능을 갖춘 뜨
거운 온천수가 우리의 피곤을 풀어주기엔 충분했다.

노천탕으로 가니 북녘하늘에 나무들이 둘러싸여 북녘 땅이 분명하건만 마치 우
리 쪽 온천장에 온 듯한 생각이 들었다. 상쾌한 찬 공기, 푸른 하늘을 보며 따뜻
한 물 속에 있으니 그 어떤 여왕도 부럽지 않았다. 다만 이 좋은 시설을, 이 따
뜻한 물을 북녘 사람도 아니 최소한 온정리, 성전리 사람들 만이라도 함께 공유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수에 피곤을 씻어버리고 로비로 나오니 만나기로 했던 남편이 한참 후에야
나왔다.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을 만났는데 온천장 책임 매니저로 나와있다
는 것이었다. 세상이 참 넓고도 좁다는 걸 느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온정리 휴게소로 왔다. 광장엔 현대 금강산 관광 버스가 발
딛을 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물건 파는 사람들이 북한 사람처럼 생겼기에
알아봤더니 역시 조선족이라는 것이었다. 북녘에서 만든 빈대떡인 줄 알았는데
남측에서 가져와 만든다기에 안 먹으려다 목욕 후의 배고픔에 커피와 함께 빈대
떡을 맛있게 먹고 말았다.

온정리 휴게소에서 20분의 자유시간을 가진 후 봉래호로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
다. 오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많은 주민들이 들판에서 아직도 일을 하고
있었고 성전리 마을 앞에도 주민들과 아이들이 집 밖에 서 있는게 보였다. 우리
가 손을 흔들자 군인들과는 다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통행검사소에서 입국때 처럼 검색을 마쳤다. 아침보다는 훨씬 긴장이 덜되어
눈 마주칠까봐 조금은 두려웠던 북녘 세관원의 얼굴도 마음 껏 쳐다 볼 여유가
생겼다. 시간의 흐름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해주었다.

봉래호로 돌아와 객실에 들어서니 내 집에 온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람과 함
께 산행을 한 탓에 감기는 아침보다 더욱 심해졌다. 누워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
으나 공연장으로 올라가 관광객들의 노래 잔치가 어우러지는 한 마당에 동참했
다. 호젓한 산사를 벗어난 스님과 비구니들의 모습이 공연장에서 유독 눈에 띄었
다.

공연이 끝나고 남편은 선상에서의 낭만을 더 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열이 올라
내 눈은 저절로 감기고 콧물 감기로 머리가 터질 듯 아파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
웠다. 온 몸이 나른해지며 어디론가 푹 가라앉는 것 같았다. 먼저 자라며 혼자서
라도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남편은 나갔다. 남편이 없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 남편이 오는 것을 보고 그 때서야 잠 속으로 미끄러졌다. 유
람선은 작은 움직임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만물상이 정말 있었네

4월 9일 일요일. 장전항에 입항한 후 부터는 아이들에게 전화연락이 안되어 걱
정이 되었다. 그러나 가까이에 오빠와 동생이 있고 믿음직한 내 딸이 있기에 마
음을 놓기로 했다. ‘우리 걱정 말고 아프지 말고 아빠랑 재미있게 지내다 오
라’던 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제처럼 일찍 일어나 정성스럽고 맛깔스럽게 준
비된 다양한 뷔페음식으로 식사를 끝냈다.

통행검사소에서 어제와 똑같은 절차를 마치고 만물상을 보러 버스에 올랐다. 일
요일이라 단체로 어디를 가는지 마을 주민들이 버스 바로 옆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산에서 만난 주민중에서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창가에 얼굴을 완전 밀
착시킨채 내다봤다. 햇빛에 그을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모습이 너무 안 어울
려 차라리 안쓰러웠다. 옷은 역시 남루했고 체격은 작고 말랐으며 옷 색깔은 군
청색.회색.남색 등으로 머리는 부시시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마치 60년대 우
리 모습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빨강 투피스에 구두.핸드백까지 들고 가는 젊은 여자가 눈에 쏙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혼자서만 그런 옷을 입고 가는 걸까? 무척 궁
금했다. 그러나 그 여자도 다른 주민들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하긴 현대 차 외
엔 북한 차량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또 검정옷과 몸에 꼭 끼는 트레이닝 복을 입은 아이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
어가고 있었다. 반가움을 가득 담고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주민들을 뒤로 한채
우리를 태운 버스는 지나쳤다. 가다 보니 ‘우리식 대로 살아가자’는 커다란 현수
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북녘 땅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만물상을 찾아 우리를 태운 35인승 관광버스는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갔다. 그
산속에도 우리를 지켜보는 군인들이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채 오늘도 곳곳에 서
있었다.

차창밖으로 펼쳐져 있는 높이 3m의 관음폭포 골짜기엔 아직도 눈이 채 녹지못
한 채 얼음으로 남아있었다. 관음봉 줄기의 바위벽은 길이가 100m나 되고 모양
이 삐죽삐죽하며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바위색
이 희끗희끗하여 달빛아래서는 육각의 눈송이로 보여 육화암 또는 눈바위라 불린
다는 조장의 설명에 버스에서 바라다 보는 육화암은 그냥 희뿌옇게 보였다.

만물상까진 101구비까지 있는데 우리가 내린 주차장까진 99구비였다. 대관령 구
비는 길고 넓은 것 같고 만물상 구비는 좁고 짧았다.

만상정근처의 주차장에 내려 조금 걸어가니 왼쪽에 귀신의 얼굴처럼 보인다는
귀면암을 시작으로 금강산의 절경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거
쳐 융기.침식.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기묘한 바위와 절벽들이 하나의 완성된 작
품처럼 즐비했다.

깍아세운 듯이 나란히 서 있는 세개의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었다. 구
름이 흐를 때 바위들이 움직이는 듯한 모양이 마치 하늘에서 세 신선들이 내리
는 것 같다하여 삼선암이라 하였다.

드디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만물상에 도착했다. 금강산 중에서 가
장 빼어나다는 만물상은 장엄하고 억센 강한 남성미를 풍기는 힘있는 산악으로
되어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빚어놓은 듯 만가지 모양을 하며 다양한 형
태의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과 일만 이천봉 이라는 말 그대로 거대한 산 봉우
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파른 산길은 오르기 쉽도록 돌 계단으로 만들어 놓았고 쇠 줄로 손잡이를 해
놓았다. 쇠줄을 잡고 한참을 오르다 보니 손이 시렸다. 같은 조로 친해진 42세
노처녀 명숙씨가 골프장갑 한 짝을 건네주었다. 혼자서 금강산 여행길에 오른 노
처녀의 용기와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인생은 저렇게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라는 생각에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동해항까지 오면서 산과 고속도로 곳곳에 붉고 노랗게 물들이며 흐드러지게 피
어있는 개나리 진달래가, 눈을 어디로 돌려도 꽃은 피어있었던 우리의 산하와 다
르게 만물상쪽 금강산 그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았다. 봄이 아직 시작되지 않
아서일까? 겨울의 꾸물거림으로 푸른 새싹하나 나무의 새순하나 돋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옥황상제의 딸과 만나기 위해 나무꾼 총각이 도끼로 바위를 찍어 올라간 자국
이 남아있는 절부암이란 바위엔 정말 커다란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리고 곰처럼 생긴 곰바위, 세 아이의 모습을 한 동자바위.장수바위.독수리바위.
얼굴바위 등등이 나타났다.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수많은 봉우리와 절벽을
보니 ‘천하절경 금강산’ 이란 말이 나옴직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물
체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 같은 이름 그대로 만물상이었다.

산길을 돌아 경사가 급해 쇠줄이 아니면 오르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한참 후에 하늘과 푸른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해발 1032m
의 망양대에 맨 먼저 올라섰다. 떠나갈 듯한 강풍이 불었지만 그 곳에도 북측 안
내원 두 명이 찬 바람과 맞선채 서있었다. 오랜 시간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
에 내가 느낀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날씨가 흐려 동해바다는 보이지 않고 안개에 쌓인 기암괴석을 안은 산들이 내
발 밑에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낭떠러지 위에 걸터앉은 것 같은 바위에 나 또
한 걸터앉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
거리고 아득했다. 세찬 바람에 비가 한두 방울씩 그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금강
산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동해바다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천선대로 가기위
해 내려왔다.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의 가파름과는 반대로 쉽게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