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4) -신옥

제 목
금강산은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4) -신옥
작성일
2000-07-27
작성자

산행은 쉽고 생리작용 억제는 어려워라

두시간이 넘은 산행 길에 화장실이 급했으나 좀더 참아보기로 하고 천선대로 발
을 옮겼다. 두 시간을 참지 못하는 생리구조 때문에 지금 내려간다 해도 참을
수 있을지 아득했다. 그러나 참을 수 있는 데까지 버티기로 하고 화장실 가는
걸 포기했다. 유료 화장실 사용료가 4달러 인데다가 무엇보다도 사용 후 젤로 굳
어진 그 분비물을 비닐에 싸서 주차장까지 가져와야 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
다. 그러기엔 난 아직은 젊다고 생각되었다. 용기를 내어 산을 올라갔다. ‘고지
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는 싯귀까지 떠올리면서…….

망장천에 오르기 전 아래 위 모두가 절벽이지만 벼랑턱이 말 안장처럼 생겨 마
음놓고 쉴 만하다 해서 안심대라 부르는 전망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간
식으로 준 쵸코파이가 처음으로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먼지하나 없을 정도로 깨
끗한 길 위에 쵸코파이가 부스러 지는 것도 부담이 되어 발로 쓱쓱 문질렀다.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물을 마시면 힘이 솟구치는 바람에 짚고 올라왔던 지팡이
마저 잊어버리고 간다는 망장천까지 올라왔다. 남들은 꿀꺽꿀꺽 마시는 물을
난 화장실 걱정에 입에 적시기만 했다. 예쁜 북측 안내원이 단정히 앉아 그 샘물
에 대해 관광객에게 설명을 하고있는데 그 곁에 앉은 관광객은 아무 생각없이 쵸
코파이를 먹고 있는 것 같아 내가 괜히 민망했다.

관광객은 대부분 노인들과 젊은 가족,단체 여행객이었는데 힘든 코스인데도 기
어이 산행을 감행하는 노인들을 보니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최정상 까지는 오르
지 못하고 중간 중간에 쉬고 있는 노인들도 많았다. 외국인은 콜럼비아인 부부만
이 눈에 띄었다. 외국인이 금강산을 찾도록 많은 규제가 풀려야 되고 관광상품
도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줄을 잡고 오르기에도 겁이 난 힘든 계단을 다리가 후들거리면서도 올라가니
하늘 문이 날 반겼다. 금강산의 돌문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고 꼭 막힌 벼랑
에 있어 이 문이 없었으면 천선대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고 천선대가 있는지
도 몰랐을 것이라 한다.

하늘문을 지나 가파르게 내려가고 오르니 해발 936m의 천선대가 드디어 나타났
다. 애국가의 배경이 되었다는 곳이 바로 이 천선대이다. 수백길 벼랑 끝에 있
는 만물상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 눈에 드러나는 전망대였다. 한 순간 개인 날씨
로 1263m나 되는 오봉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다. 제
각기 색다른 모습을 자랑하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 바로
옆에 김일성 장군의 찬양비가 그 높은 곳에도 어김없이 떡 버티고 있었다. 그 앞
에서 사진 한 장을 찍으며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발 밑으로 구름이 얕
게 피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고 나니 내려갈 일이 걱정되었다. 이제부터 줄달음치면 주차장까진
30-40분이면 내려갈 것 같았다. 남편에겐 천천히 구경하며 사진 찍고 오라고 한
뒤 마라톤 선수처럼 뛰고 또 뛰었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앞으로 꺽이면서도 뛰고
뛰었다.

‘저 아가씬 힘이 넘치나 봐. 걷기도 힘든데 막 달려가네.’ 쉬고 있던 사람들의
말소리에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화장실을 향해 그저 열심히 줄달음쳤다. 내
뒷모습만 보고, 뛰는 것만 보고 아가씨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화장실 때문이라
고 하면 웃을 것 같았다. 뛰면서도 기분은 처참했다. ‘이게 뭐람! 천하 절경 만
물상을 천천히 음미하며 보고 또 보며 내려와도 시원찮은데……’혼자 궁시렁대
면서도 뛰었다.

멀리서 귀면암이 보이고 이내 주차장 지붕이 내 눈에 들어왔다. 풀려서 주저앉
을 것 같던 다리에 갑자기 힘이 솟아 주차장 화장실까지 바람처럼 뛰었다. 화장
실은 물은 나오지 않고 거품처럼 처리되는 처음 보는 특이한 화장실이었다. 배뇨
의 시원함을 느낀 것은 잠시이고 기진맥진하며 허망한 마음이 들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빨리 왔다며 버스 문을 열고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인다. 대
답대신 베시시 웃고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땀으로 젖은 옷 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차가웠다. 남들은 산행이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화장실 문제가 힘들다는
게 서글펐다. 열어놓은 창 틈으로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휘날려 내 무릎에 뚝 떨
어졌다. 마치 나처럼 생각되어 손 바닥에 올려 놓았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나이드신 분들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가 바
람 분다며 버스 사이로 돗자리를 깔아 주며 식사를 하라고 권했다. 한참을 기다
리니 남편이 내려왔다. 어제와 똑같이 도시락은 순간 발열체로 되어있어 순서대
로 조작하니 뜨거운 카레 덮밥이 되었다. 바람까지 부는 차가운 날씨 속에 산속
에서 밥을 먹고 나니 뜨거운 커피생각이 오늘은 더욱 간절했다.

연변에서 온 기사 아저씨는 2년 계약으로 왔다고 한다. 계약기간 동안은 휴가
도 없어서 가족이 무척 보고싶다고 했다. 특히 여행 온 아이들을 보니 만나지 못
하고있는 자식들이 보고싶은게 제일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월급은 36만원이지
만 중국 돈으로 환전하면 꽤 큰돈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둥근 얼굴에
넉넉한 시골 아저씨처럼 순순함이 묻어 나왔다.

피곤해서 모두들 잘거라던 조장 말 그대로 버스 속의 우린 대부분 잠들고 말았
다. 아까의 그 군인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나도 남편의 어깨에 기댄
채 졸면서 금강산을 떠나왔다. 눈을 뜨니 정주영씨도 하룻밤 묵었다는 금강산 여
관이 다시 보였다. 지금은 군인 휴향소로 쓴다고 했다.

북녘 배우들의 수준 높은 공연

빠듯한 시간을 내어 온정리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니 피곤이 가시는 듯 했
다. 휴게소에 내려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을 25달러를 내
고 관람했다.

평양 교예단은 52년에 창단되어 모나코 세계 서커스 대회에서 최우수상인 금상
을 수상하는 등 수준높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2층에서 악단의 연주와 함께 공연을 하니 더욱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밧줄타기.
사다리 중심잡기.공중 그네타기.널뛰기 등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전통민속놀이
를 공연화 한 것이 많아 흐뭇했고 과연 세계수준이라 할 만했다. 특히 공중에서
3단 돌리기 그네 타기와 사다리 타기는 예술 그 자체였다. 금강산 관광의 묘미
를 절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 하나만으로도 금강산여행 오
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특유의 사회자 말투 때문에 처음엔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민망했
다. 북한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와 말투가 다르다고 웃는 것
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단원들은 많은 공훈배우로 구성되었는데 인형처럼 작
고 날씬한 여 단원들은 참으로 예뻤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정말인 것 같았다. 고
난도의 공연을 할 때마다 가슴이 짜릿해지며 괜시리 눈물이 솟구쳤다.

한 시간 넘도록 웃음과 긴장으로 엮어진 공연이 끝나자 전 단원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했다. 이 때만 사진 촬영이 가능했는데 버스에다 카메라를 놔두고 와 소
중한 그 순간을 놓쳐버려 못내 아쉬웠다. 음악이 흐르고 무대에선 심혈을 기울
여 공연한 단원들이 손을 흔들고 우린 기립박수로 공연장을 꽉 메웠다. 마치 남
북이 하나 된 듯 뜨거운 기류가 흘렀다. 내 옆의 노처녀 명숙씨는 가슴이 떨려
사진을 못 찍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물을 보였다. 명숙씨도 즐거운
공연을 보고서도 눈물을 흘렸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2층의 10여명으로 구성된 악단에게도 계속 기립박수를 보냈
다. 나는 뭔가 미련이 남은 듯 그 공연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무대는 텅 비었지
만 악단에게 계속 손을 흔들면서 서있었다. 남편의 이끎이 없었으면 자석처럼 한
동안 꼼짝못한 채 서있었을 것이다. 연주자들도 계속 손을 흔들고 나도 계속 흔
들면서 공연장문을 나섰다. 멀게만 느껴졌던 통일도 이렇게 얼굴을 맞대면 어느
한 순간 자연스럽게 이뤄질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 밖엔 석양이 금강산 자락
에 걸터앉아 있었다.

휴게소에서 남편은 북한 양주인 들쭉 술을 사고 나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4달
러를 주고 금강산 관광안내 책자를 샀다. 종이 재질을 보니 북한의 너무 낙후
된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조잡한 문고판에 1000원을 주고도 살까 말까 한
책이었지만 북한 책자라는데 의미를 두고 샀다.

다시 두고 온 금강산

난 마지막으로 금강산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금강산은 1638m의 주봉인 비로봉
을 중심으로 주위가 80km, 면적은160km2 로 강원도 화양과 통천. 고성. 인제 4개
군에 걸쳐 분포된 우리 민족의 명산이다. 금강산은 신의 조화로움이 빚어 낸 최
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름다운 산이다. 새싹과 꽃으로 뒤덮힌 봄의 산
을 금강산이라 하고 녹음이 짙게 색칠된 봉래산, 일만 이천봉이 단풍으로 물들
어 풍악산, 나뭇잎이 진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 개골산이라 한다.

변화무쌍한 기후로 화강암체가 융기운동, 침식, 풍화작용으로 절경이 만들어 졌
다.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던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나, 금강산을 보
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논하지 말라던 일본인들이 극찬하는 그 금강산을 가슴
에 담고 나는 온정리 휴게소를 떠났다.

몇 번을 가 봐야 금강산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데 한번 와 본 내가 어찌 감히
금강산을 평가할수 있겠는가 싶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와 이번에 보지 못
한 금강산의 깊은 멋을 제대로 느끼리라 생각했다. 그 때는 북녘 내 동포의 얼굴
에도 새싹 움트는 봄이면 생명의 기쁨으로 가득찰 것이고, 꽃 피고 녹음 짙어질
때는 덩달아 싱그러워질 것이다. 또한 온갖 단풍으로 아름다울 금강산처럼 평온
해질 것이며, 눈 내리는 설원처럼 포근한 모습을 보게 되리라!

금강산도, 산 속 곳곳의 안내원도, 군인들도, 온정리, 성전리 마을도 그대로 남
겨둔채 우리만 떠나 왔다. 그러나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만이 끝까지 우리
를 따라왔다.

북한 통행 검사소에 도착해 수속을 기다리고 있는데 술렁거림이 있었다. 노을
의 아름다움에 취해서인지 버스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 사항임을 잠시 잊고 누
군가 사진을 찍어 북한측에 들켜 버린 것이었다. 북한측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후레쉬 터트리는 것만 보고도 어느 버스, 몇 번째 자리까지 안다는 것이었다. 그
렇게 어디에선가 우리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니 갑자기 등
이 오싹했다.

그 버스 안의 관광객은 내리지도 못하고 한동안 버스에 남아있었다. 며칠 간 북
한에 억류되었던 ‘민영미씨 사건’이 생각나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북측사람
과 현대측 사람들이 한참 오가더니 다행히 필름만 빼앗고 나이 든 분이라고 벌금
도 안 물고 보내 주었다.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
게 주위를 주었건만 사진을 기어이 찍고만 그 아저씨도 무척이나 놀랬을 것이
다.

북한 통행 검사소에서 마지막 절차를 마치며 출국 도장을 찍어 주던 담당자는
첫 날의 그 세관원 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내 말에 세관원도 눈을 마주치
며 빙긋이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서울 어디선가 언젠가 한 번쯤은 본 듯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미소가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았다.

봉래호에 돌아와 장전항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우리
가 봉래호에 오를 때부터 서있었던 경비병인 듯한 키가 큰 두 남자가 배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겨울 외투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따뜻한 곳에 앉아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는 나는 괜히 체할 것 같았다. 그들에
게 그냥 미안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봉래호
는 서서히 장전항을 떠나기 시작했다. 손을 높이 들어 그들에게 흔들었다. 내가
본 마지막 북한 사람에게 아쉬운 눈빛을 담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
다. 그들도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덩달아 아까 웃어주던 세관원의 얼굴
도 자꾸만 떠올랐다.

북녘 땅은 그렇게 배 안에선 봉래호 속도를 느끼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멀어져
갔다. 밤이 내려앉으며 북녘 땅은 한 자락도 보이지 않고 봉래호는 망망대해를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15노트, 파고는 1- 2m여서 바다는 잠잠했다. 승무원
381명과 승객 894명을 태울 수 있는 크기 171.6m, 폭 24m, 1만 8천톤, 객실 364
개로 갖가지 위락시설과 최고수준을 갖추었다는 유람선 봉래호는 동해항을 찾아
바다 한 가운데로 전진했다.

마지막 밤 그리고 일흔 할아버지의 설움

몸은 물에 적신 솜처럼 무거웠지만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미련이 남았다. 공
연장에 들어가 러시아 무용수들의 공연과 텔레비전에서 본 가수의 노래도 들었
다. 공연이 끝날때 쯤 사회자가 한 장의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하자 흥겹던 공연
장은 많은 사람의 눈 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천식으로 고생하면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을 찾아 금강산 여행을 왔다는 일흔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의 사
연이었다.

50여 년간 갈 수 없었던 그 고향이 바로 고성군 이라고 했다. 그 순간 공연장안
엔 아… 하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고성항에 왔는데, 그 고향에 왔는데 고향
땅 흙을 만져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어머님 생사도 모른 채 다시 돌아가야 하
는 절박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루다가 쓴 편지였다. 그리고 돌아가셨어도 좋으니
오늘 꿈속에서라도 어머님이 나타나 돌아가신 날짜라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며 끝을 맺었다.

사회자도 목이 메었고 더군다나 ‘잃어버린 30년’ 노래를 부르니 우리는 더욱 안
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행하면 즐거움이 떠오르지만 금강
산 여행은 이런저런 이유로 가슴저린 여행이 되었다. 어서 통일이 되어 이런 아
픔이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 저절로 들었다.

선상 위 포장 마차에서 남편은 노래 한 곡을 신청해 부르고 난 눈꺼풀이 내려앉
았다. 장전항을 떠난지 한참 되어서인지 아이들과 가까스로 전화연락이 되어 반
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12시 30분 경에 망망대해에서 풍악호가 장전항을 향해 가
는 것을 보고 우리도 선실로 돌아왔다. 내가 잠들어 있을 3시 30분 경에 봉래호
는 군사 분계선을 지날 것 이라 한다.

10일 아침 7시. 총 운항거리 199km를 해치고 3박 4일의 금강산 관광객을 태운
봉래호는 동해항으로 순조롭게 입항을 했다. 동해항의 푸른 산과 건물, 사람들
을 보니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뷔페식 아침을 먹고
동해항에서 출국 절차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왔다.
강원도엔 비가 내리고 여의도엔 아직도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들어서니 나 떠날 때와 똑같은 아늑함과 따뜻함이 함께 밀
려왔다. 밥을 해서 도시락을 싸 가고 동생 체육복까지 빨아 입힌 딸 아이는 아
직 중학생이었다. 깨끗하게 정돈 된 집안과 야쿠르트 병까지 씻어 엎어 놓은 것
을 보고 난 놀랬다. 부모없는 4일을 너무도 의젓하게 보낸 딸아이와 평소 정리정
돈이 안된 아들 녀석조차 제 방을 깨끗이 정리해 놓아 우습기도 하고 기특하기
도 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베란다 유리 문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 (2000년 4월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