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버지의 생신 잔치 -정경미

제 목
(수필) 아버지의 생신 잔치 -정경미
작성일
2000-10-8
작성자

정경미(주부, 부천시 상1동 반달마을)

어머니가 안계신 친정 아버지의 생신 잔치 음식은 처음엔 참 부담스러웠다. 우
리 형제들끼리 먹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8남매 형제 분들과 친구 분들이 오시기
떄문에 내 어린 마음에 더 어려웠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 것조차 서투른 데다가
일이라면 겁부터 나고 두 손 드는 내겐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이젠 여동생들이 4명이나 결혼을 했고 나름대로 어른이라 생각하는지 각
자 특기할만한 음식들을 준비해온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나 혼자 준비하던 때
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더구나 나도 결혼한지 10년 정도 되면서 제법 음식 맛도
구분이 갈 정도가 되었다. 생신 전날 밤엔 주로 셋째 여동생이 하룻밤 자고 아버
지 아침 생신상을 간소하게 준비한다. 각자 음식들을 집에서 준비해 친정으로 가
지고 가다 보니 자연 보따리가 많을 수 밖에 없다.

김치는 잘하나 못하나 항상 큰언니인 내 차지이다. 그리고 다른 준비물은 김치
두 가지와 해물탕, 과일이며, 둘째 동생은 소불고기 잰 것이다. 셋째 동생은 손
이 제일 많이 가는 전을 여러 가지 해온다. 넷째 동생은 구절판, 더덕구이에 요
번엔 날치알 쌈까지 준비했다.

생신날 오전엔 마치 출장 요리사들처럼 각자가 준비한 음식들을 맡아서 차려놓
느라 분주하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오전 때부터 이어진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네 명의 사위들은 다음날 아침 그만 필름이 딱 끊어진 듯
전날의 일들을 기억 못할 지경이 이르기도 한다. 안방에서 마루에서 화투판이 벌
어지고 안방에서 사위들과 혈전을 벌이는 큰엄마는 사위들이 한잔씩 마실 때마
다 안주를 먹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큰 엄마, 작은 엄마를 뺀 나머지 형제 분들은 고모부들까
지 모두 한바탕 외출해서 저녁 식사 전까지 사교 댄스를 한 스텝 밟고 오신다.
보통 2시간 이상 지나면 들어오시는데 작은 고모는 ‘이 동네는 왜 그렇게 사람
이 없니? 우리가 삭 휩쓸고 왔다’ 하시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신다. 나이 드
신 고모의 모습이 귀여워 나도 웃음이 나온다.

어둠이 다가오면 어른들은 마음이 급해지신다. 급히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드시
고 나면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집을 향해 각자 발걸음을 옮긴다. 사위들은 모두
만취하여 아무도 차로 배웅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우르르 쫓아나가 정류장까
지 배웅하고 돌아오면 썰물 빠져나간 자리처럼 쾡한 집안에 설거지거리만 가득하
다. 하지만 남은 일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무사히 잘 치러냈다는
안도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 혼자이신 아버지가 흥이 나는 시간. 오늘의 이 화목함과 힘찬
기운이 한동안 아버지의 벗이 되어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