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혜 주(주부, 부천시 원미구 상동 신라아파트)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시골로 이사했다. 폐결핵으로 투병중인 아버지
께 맑은 공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 정도 시골서 머무르다가 다른 식구들은
다시 대구로 이사하고, 나는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살게 됐다. 혼자 계시는 할아
버지는 적적하셨을 테고, 아버지를 간병해야 하는 엄마가 네 명의 아이를 다 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도시에서 시골로 전학을 간 나는 꽤 공부를 잘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할아버지와 사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선생님들은 나를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고, 그 덕분에 나는 매일 매일 행복하게 보냈다. 학교에서
는 교복도 맞춰 주고, 매 학기마다 학용품을 종류별로 구비해줬으며, 교내외의
큰 장학금을 많이 챙겨 주셨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시던 어느 여선생님은 가끔 나를 불러서 맛있는 저녁도 해
주시고, 하룻밤씩 재워주기도 하셨다. 그 선생님 댁에 가는 날이면 나는 학교 수
돗가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었다. 그 선생님 댁에서 처음으로 카레라이스나 오
므라이스 같은 음식을 먹어 보았다. 맛있는 과일이나 과자도 먹고, 예쁜 이불에
누워서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4학년 때쯤 슬슬 꾀를 피우면서 담임선생님 말씀을 잘 안 듣기 시작했
다. 청소시간에는 도망가고, 공부시간에는 동화책을 몰래 펴놓고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점 꾀를 많이 부리기 시작하자 착하신 담임선생님은, 엄마랑 떨어져
사는 내가 혹시 빗나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많으셨나 보다. 어느 날 숙직실로
부르시더니 엄한 꾸중을 몇 마디 하시고는 그만 나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셨다.
원래 눈물이 많은 나는 같이 울면서도 ‘내가 선생님 우실 일까지는 안한 것 같은
데……’하고 생각하며 당황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을 더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
아서 이제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그 시절에는 고전 읽기 경시 대회가 해마다 있었다. 강감찬, 신사임당, 계백장
군 같은 책을 읽고 문제를 풀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독후감을 쓰는 대회였던 것
같다. 이 대회를 준비할 때면 학교에서 늦게까지 남아서 책을 읽고 문제 푸는 연
습을 했었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5리쯤 되는 캄캄한 들길을 걸어
가야 했다. 하나둘 친구들이 자기 동네 가는 길로 빠져나가 버리면, 집이 가장
멀었던 나는 혼자서 걸어가야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초롱을 들고 마중
나와 계셨는데, 먼데서 작은 초롱불이 반짝거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들이 당직하시는 일요일이면 늘 학교에서 놀았다. 운동장에서 공놀이
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선생님이 해주시는 점심도 얻어먹었다. 그 중에서도 숙직
실에서 명화극장 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로마의 휴일, 황태자의 첫사랑, 애
수” 같은 흑백영화를 그때 처음 보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고 하면
선생님께서는 “너, 이해는 다 하면서 우냐”하고 웃으셨다.

6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밤나무 묘목을 키운다고 밤을 학생마다 일곱 개씩 내
서 심은 적이 있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 일을 도와드리고 집으로
갈 때면 배가 꽤 고팠다. 어느 날 친구와 나는 그 밤에 생각이 미쳤고, 밤을 심
은 밭고랑을 파봤더니 심은 지 며칠된 밤에는 벌써 싹이 나 있었다. 하지만 싹
난 게 대수랴. 우리는 그후 며칠에 걸쳐 그 밤을 꽤 많이 파먹었다. 싹이 나지
않은 그 몇 고랑을 선생님들께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게 되어 자칫 기죽고 우울할 수도 있었을 텐
데, 그런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을 보니 나는 아주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선
생님들을 만났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가 자라면서 어려운 형편에도 한결같
이 밝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사랑의 자양분 덕분일 것이다. 지
금도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이 날 듯이 그립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