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농사 짓는 오빠 -권명옥

제 목
(수필) 농사 짓는 오빠 -권명옥
작성일
2000-11-14
작성자

권 명 옥(주부, 부천시 원미구 상1동 반달마을)

지난 봄에 환갑을 맞이하셨던 오빠는 생각지도 않았던 농사를 짓느라고 혼자 산
다. 어느 도시 버스 터미널에서 가까운 변두리에 허름한 조립식으로 거처를 마련
해 놓고, 흙을 뒤집어 텃밭을 일구어 놓았다.

그 텃밭에 흙을 고르고 거름을 해서, 참깨와 열무를 비롯하여 상추며 쑥갓 씨
를 뿌렸다.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깨 너머로 배우
며 시작한 농사였다. 김도 매고 풀도 뽑아주면서 때맞추어 비가 안 오면 지하수
에 호스를 연결시켜 물을 주고 있다. 몸에 배인 부지런한 습관은 넓지 않은 텃밭
을 꽃밭 가꾸듯이 농사일을 한다.

오빠는 딸 넷에 아들 하나. 오 남매 아이들의 덫에 걸려 짓눌린 그 어깨를 언
제 한 번 펴보지 못하였다. 천직으로 여겼던 일터를 잃고 방황하던 때도 있었
다. 몇 번씩이나 직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책임은 충실하였다.

이제는 딸들을 출가시키고 아들 혼인시켜 며느리보고 손자까지 보았다. 그리고
예쁜 손자 재롱을 보면서, 편히 쉴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두 손 놓고
지내기가 아직은 젊다는 것이다. 마땅히 하는 일도 없는 서울 생활이 답답하다면
서 집을 떠나 혼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손수 끼니를 지어먹으면서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형제들이 그 무슨 청승이냐고
말렸다. 하지만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 걱정 말라면서 그 생활을 즐겼다. 매
미소리를 들으면서, 오빠는 찐득거리는 더위와 함께 여름을 같이 보냈다. 서투
른 농삿일하느라 검게 타버린 모습은 갈데 없는 농부였다.

참깨를 심어 거두어들인, 그 자리에는 겨울 동안 먹을 김장 배추가 자라고 있었
다. 풀 한 포기 없이 호미질한 배추 밭두렁이 정갈하게 머리 빗은 가르마같이 줄
지어 있었다. 부지런한 손끝으로 짓는 농사지만 해충이 생기는 것은 막을 도리
가 없었나 보다. 벌레 먹은 흔적이 군데군데 보이는 푸성귀들도 자란다. 호박과
오이는 모종을 하여 덩굴이 자라 오르게 울타리를 세웠고, 듬성듬성 심은 옥수수
가 포대기를 두르고 업혀 있었다. 작은 방울토마토까지 소리 없이 달려 있다.

배추밭 옆에는 고추 농사가 풋내기 농부의 체면을 한껏 세워줄 만큼 풍성하게
자랐다. 한 뼘 길이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매달린 무게로 가지가 늘어져
버팀목을 꽂아 받쳐놓았다. 기름을 발라 씻은 듯한 싱싱한 풋고추를 검은 비닐
봉투에 따 넣어 주면서, “이거 하늘에서 온 비 말고 아무 것도 안 뿌린 거다.”하
신다. 오빠는 암탉과 수탉도 함께 치면서 유정란도 받아 모으고 있다. 찾아오는
이웃들과 술잔도 나누면서 전원일기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오빠는 그 동안 일터와 집만을 시계추처럼 오가면서 살았다. 친구들 모임도 사
양하고 취미 생활도 모르고 여유 없이 보낸 세월이었다. 오로지 가족들의 생계만
을 어깨에 짊어지고 허덕거리면서 살아온 날들이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직장 생활에서 찌들려진 몸과 마음이었다. 오랫동안 입었던 옷을 벗어
시냇물에 흔들어 빨 듯이, 오빠는 지난 세월 분진들을 털어 내고 있었다. 흙을
밟고 기지개를 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