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채팅 – 감춤과 드러냄의 언어

제 목
(칼럼) 채팅 – 감춤과 드러냄의 언어
작성일
2001-02-2
작성자

채팅 – 감춤과 드러냄의 언어

이유남(사이버 문화 평론가)

인터넷 서비스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고, 그야말로 한 번 빠져들면 도끼자루 썩
는 줄 모를 만큼 흡인력 높은 서비스가 바로 채팅이다. 채팅의 채트(chat)란 잡
담을 뜻한다. 그러니까 채팅이란 온라인 상에서 사용자끼리 가볍게 나누는 대화
를 가리킨다.

채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화 상대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채팅의
익명성이라 부른다. 대개의 채팅은 상대방의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이나 성별, 나
이, 직업 따위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익명성 때문에 현실
세계의 대화에서처럼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별로 없다. 즉, 칠십 노인과 열 살짜
리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를 나누고,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고하, 또
는 남녀 간 교제에서 많이 의식되는 외모 따위를 초월하여 훨씬 개방적이고 허심
탄회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또 반대로 얼굴을 마주한 대화가 아니므로 욕
설이나 험담, 성적 농담이 난무하는 것도 채팅의 특징이다.

언어적 측면에서 보면 채팅은 일종의 “말쓰기”라 할 수 있다. 즉 구어와 문어
의 중간에 해당한다. 타이핑을 통해 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는 문어의 외양을 지
니지만 그 표현의 성격상 구어에 가깝다는 얘기다. 문어란 일반적으로 논리적이
고 격식을 요구하지만, 구어란 이에 비해 훨씬 자유분방하고 탈 권위적이다. 그
런 의미에서 채팅은 청소년들의 의사소통의 기본 감정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
다.

그런데, 말의 빠른 전달과 교환을 요구하는 구어체 대화에서 이를 타이핑으로
전달하려다보니, 채팅에서는 자연스럽게 약어를 선호한다거나 맞춤법 상의 받침
이나 어미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채팅 초보자가 처음 대화방에 들어갔
을 때 흔히 접하게 되는 대사가 ‘방가(반가와요)’, ‘어솨요(어서오세요)’ 따위
의 말이다. 이런 자주 쓰는 인사말을 일일이 맞춤법에 맞게 쳐 넣는다는 것을 생
각해 보라. 정말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일 것이다. 영어 채팅에서 ‘M or F?’
즉 ‘ Male or Female?’(당신 남자냐 여자냐?) 같은 말도 바로 그런 예 가운데 하
나이다.

채팅이 청소년들의 언어 문화를 오염시킨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실제적인 필요가 깔려 있는 셈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언어 문화가 일군의 채팅 참여자들 사이에 전파되고 공유되면서 그들
내부의 결속력 내지는 차별화 욕구와 만나는 지점을 간과할 수 없다. 즉 그것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은어이기도 한 것이다. 은어가 우리말을 망가뜨린
다는 보수적 입장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종류의 언어 문화는 누가 이래
라 저래라 한다고 해서 고쳐지거나 정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

채팅에서 또한 논란이 되는 것은 앞의 익명성이 발전하여, 온라인 대화 속에서
현실의 자아와는 사뭇 다른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탐닉해 들어가는
현상이다. 내가 아는 어떤 여중생은 채팅에서 사귄 고등학생 오빠와, 같은 고등
학생 행세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 때문에 고등학생들이 보는 교과서나
잡지 따위를 열심히 뒤적거린다. 채팅에서는 이론적으로 그 무엇이든 될 수 있
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로, 여자가 남자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연령
이나 직업, 세세한 성격이나 취향 모두를 다른 것으로 가장할 수 있다.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 점을 매우 못마땅하고 불안하게 여긴다. 이것은 현실도피
이자 자아분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관련한 사회학과 심리학의 최근
논의들은 이에 대해 색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즉 인간의 자아가 원래 흔히 생
각하듯이 그렇게 단일하거나 통합적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다른 자아
를 연기하고 싶은 욕구는 현대인들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욕망이라
고 본다. “스크린 위의 인생”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한 이 분야의 전문가 셰리
터클 교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여러 가지 자아를 연기하는 과정에서 전
에 미처 몰랐던 자아의 다양한 측면들과 만나게 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현실
생활에서 뒤틀려 있던 자아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에 모두 동의
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귀담아 들을 만한 의견이다.

채팅의 중독성은 전자 오락의 중독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의 우려의 대상이
다. 사실 중독성 문제는 비단 청소년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른들은 균형감각
이 뒤떨어지는 청소년들에게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거라고 걱정한다. 약도 지나치
면 독이 된다는 해묵은 지혜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중독은 청소년들에게 다른
매력들에 대한 접촉의 기회들을 차단시킨다는 점에서 청소년 스스로 극복해 나가
야 할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중독에는 중독으로 빨아들이는 요인과 밀
어넣는 요인이 공존한다. 따라서 이 요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의 훈계나 강제
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최근 인터넷 활용 교육의 연구 테마 가운데 하나는 채팅을 사회 관계나 갈등 해
결을 위한 교육적 목표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미 알파월드(Alpha World) 같은
유명한 3차원 채팅 서비스들이 교육적 목적의 커뮤니티 서비스를 선보였다. 채팅
이란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냐에 따라 개인의 탈사회화를 초래할 수도, 반대로 사
회성과 협업 능력을 발달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 디그(www.dig.co.kr)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