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공화국의 지식인
친일공화국의 지식인
/ 조문기
지난달 28일 국회의원들의 친일파 명단 발표 이후 친일파 문제가 언론의 집중 조
명을 받으면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친일 반역자들의
청산과제보다도 일부인사의 포함을 놓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이 주류를 이루는 것
을 보면서 친일공화국의 실체가 발가벗겨지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처럼 조국이 분단되고 분열할 것을 예상하고 몸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
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 반역자들
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있을 리 없다. 한데 현실은 어떠한
가.
`해방’된 나라는 바로 친일 반역자들의 차지가 됐다. 눈치보고 비위 맞춰가며 모
시던 일제라는 상전은 가고, 새로 군림한 상전 미국은 `반공’만 외쳐주면 나라
를 송두리째 맡기고 보호해준다. 그래서 일제에 빌붙으면서 익힌 수법을 교묘하
게 활용해서 든든한 배후를 등에 업고 친일공화국 건설을 추진하기 근 60년이
다.
이젠 철옹성같이 높고 두꺼운 담장 안에 안주하면서 친일천하를 외치고 사는데,
누가 감히 접근하랴 싶었던 담장 한 구석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달걀로 바
위 치기와 같이 가소롭게도 생각되겠지만, 놔두면 자꾸 망치질을 해대고 그러면
금도 가고 깨질 수도 있다. 그래서 호위병들을 출동시킨다. 그것이 바로 오늘 그
들이 그 자리에 있게 한 친일논리의 첨병, 지식인·학자들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공과론’을 내세우지만 그들이 지식인이요 언론인이요 학자라
면 백 개, 천 개의 공이 있어도 한 번 민족을 배신한 죄를 덮을 수 없다는 걸 모
를 리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아무리 많은 독립운동을 했어도 끝에 가
서 변절을 해서 침략자에 빌붙으면 전공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가차없이 친일 반
역자로 낙인이 찍힌다. 반대로 백 가지 친일반역을 하다가도 민족의 양심으로 돌
아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전과는 모두 덮이고 독립 유공자로 국가가 포상을
하고 있다. 그것을 `선친일 후반일’ 또는 `선반일 후친일’이라고 해서 포상에 엄
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끈질기게 공을 내세워 공·과를 물타기하려는 친일논리는
친일세력들의 교만을 부추켜서 민족 앞에 사죄의 길마저도 막고 온 천지에 친일
반민족자들의 각종 기념물·조형물들이 들어차게 만들었다. 마침내 혈서를 몇 번
씩 써바쳐가며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운동자 때려잡는 일이라면 신바람
이 나던 친일장교 박정희를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기 위한 거대한 기념관을 국
민의 혈세로 짓겠다는 정신 나간 나라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도대체 친일파 16명의 명단 공개만으로도 가슴이 쓰려 그들을 감싸기에 열을 올
리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의 지식인이고 학자란 말인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에서 어려운 형편에도 친일 언론인·문화
인 40여명의 죄상을 담아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친일시화전을 개최했을 때 사람들
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이런 짓을?” 하고 크게 놀라고 분노하던 모습이 지금
도 눈에 선하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 중에 친일 안 한 사람 어디 있고, 독립운동 안 한 사람 어
디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역시 대표적인 물타기 수법이다. 말
하자면 친일이 별 거 아니라는 논리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반일(독립운동) 또
한 별 거 아니라는 논리와 맞닿는다. 이렇게 그럴싸한 친일논리로 국민을 오도하
고 친일 반민족 세력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공격이 가해지면 가로막아주
는 첨병이 돼 주는 게 적지 않은 오늘의 지식인이요 학자들이다.
지식인·학자들의 할 일이 고작 공과를 구분을 물타기하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깎
아내리는 일밖에 없다면 민족의 미래는 없다. 모처럼 고개 든 친일청산의 국민여
망을 교묘한 친일논리로 뒤덮어버리려 하지 말라.
조문기/ 독립운동가·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 한겨레 2002.3.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