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퇴근길을 울며 갔던 그 시절
한 시간 퇴근길을 울며 갔던 그 시절
강혜원(용산공고 교사, http://soback.kornet.net/~norae)
오래 전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이맘 때쯤 아마
도 12월 가까운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중 3 담임을 하며 원서를 쓰고 났을 때
니까요. 교장실에서 선도위원회라는 게 열리고 있었습니다. 가출했다 돌아온 우
리 반 아이를 어떻게 처벌할 건지 의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아이는 수십여 일
쯤 집을 나갔었지요. 말없고, 착하기만 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가출을 했던 겁
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가정 형편도 그리 문제가 될 건 없었지요. 속으로 곪아
있었다는 생각을 나중에 하긴 했지만….그 애 없는 동안 입학원서 쓰는 때가
되어 어느 상고에 원서를 낸 상태였지요.
아이의 상황에 대해 죽 이야기하던 중 교장선생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장기
결석하는 아이 입학원서를 써서 내면서 교장인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었느냐
고? 누가 책임지려고 그랬느냐고? 이런 선도위원회 자기는 불쾌해서 더 이상 있
을 수 없노라고… 담임인 나는 가능한 그 애가 처벌을 덜받게 되는 방향으로
결론 나길 바라느라 마음 단단히 먹고 시작한 회의였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은 회의 초반부터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겁니다. 담임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같이 화를 내며 따졌을 지도 모릅니다. 미리 말씀 못 드린 것 죄송하지
만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애가 가출 상태라 원서를 못 쓴다는 법이 있느
냐고? 무슨 문제가 일어나고, 무슨 책임질 일이 생긴다는 거냐고?
그러나 나는 아무 소리 못하고 얼굴이 벌개진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습니
다. 그 회의의 결재권을 가진 사람이 회의를 못하겠다고 화를 내며 일어난 상황
에서 나는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수십일 결석에 단란주점 같은 데
서 일하다 왔습니다. 3학년말이니까 전학이나 퇴학을 시키기는 쉽지 않았겠지
만 그런 결정이 날까봐 한 편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일 처리를 매끄럽게 못했다는 생각에다가 아이의 처벌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나
는 정말 꼼짝 못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우고, 팔이 올무로 묶인 사람처럼 정말
무력했습니다. 모욕감에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막느라 힘겨워
하고 있었습니다.
집히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몇 차례 이런 저런 일로 교장 선생님 마
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 문제로 담임들을 나무랄 때 그건 그
렇게 나무라서는 안 된다고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었죠. 그리고 그 다음날 교장
실에 불려가 점잖은(?) 나무람을 들었지만 수긍하지 않고 다시 내 생각을 되풀
이 말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방학책을 사라고 권하던 시절인데 우리반
은 원하는 사람만 사라고 해서 단 한 명이 방학책을 샀던 일도 있었습니다. 교
사 서명 문제로 불려갔던 자리에서는 ‘절차를 밟아서 징계를 하시던지 하라’며
뻣뻣하게 굴었죠. 그밖에 교장실에 찾아가 몇 가지 건의를 한 적도 있었구요.
약간은 권위적이었던 그 분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내가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무람을 넘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기까지 하는 교장 선생님의 행동은
요즘 아이들 말로 ‘오버’였습니다. 나까지 박차고 일어나면 행여 아이에게 조금
이라도 불리할까봐..(그런 것도 아닐텐데) 나는 그 힘든 순간을 참아내느라 머
리가 휑하니 빈 것 같았습니다. 다들 당황한 상태에서 회의는 엉거주춤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생각이 잘 안나지만 대략 무난한 선에서 처
벌이 결정되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날 어떻게 퇴근 시간까지 버텼는지 모르겠습니다. 애들 수업이 다 끝났을 때
여서 금방 퇴근 시간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혼자가 되었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마침 빈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순간 눈물이 쏟
아졌습니다. 일산에 살 때라 버스로 꼬박 한 시간을 넘게 가야했습니다. 나의
눈물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