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변할 줄 모르는 언론인들의 기회주의
끝내 변할 줄 모르는 언론인들의 기회주의
– 군사 독재에 봉사한 언론은 청산되었나?
신문과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 매체들이 문민정부의 과거 청산 작업과 사정
활동에 뛰어 들어, 마치 때를 만난 뭣들처럼 야단들이다. 이 나라의 민주화는
언론이 도맡아서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다 좋은 일이다. 어차피 대
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본질이 되어 버린 부정과 부패의 척결이 정부의 힘만으로
는 역부족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런지 반갑다기보다도 어
떤 걱정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곤 한다.
“뒤가 뻔한 짓을 또 시작하는군…. 철저한 기회주의 언론들!”
자유당 이승만 정권 후반기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언론계를 떠나기까지
세 정권 하에서 지금과 같은 작태가 되풀이되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대학으
로 옮긴 뒤부터 지금까지 역시 세 정권 아래서 같은 꼴을 보았고 또 지금 보고
있다.
4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서, 6대의 정권이 바뀌는 동안에 목격하고 체험한 결
론은 소위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의 전천후적 기회주의이다. 영원히
변할 줄 모르는 그 일관된 기회주의의 속성은 바람의 방향이 살짝 달라질 듯한
낌새만 보여도 풍향침(風向針)보다도 먼저 재빨리 표변하는 뛰어난 선천적 처세
술이다. 정말로 놀라운 재능이다.
부패 타락으로 이름난 이승만 정권이 그 악명높은 폭정을 12년씩이나 계속 할
수 있었던 배후 세력은 두 가지 였다. 419 학생 혁명의 기운이 수평선 위에 그
심상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여태까지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
령” “세계적 반공주의 지도자”를 외쳐댔던 이 나라의 신문(기자)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승만 대통령 자유당 정부의 부정 부패 타락의 폭로에 앞장섰
다.
지금의 김영삼 정부처럼 이승만 독재 정권의 뒤를 이은 민주당 정부도 초기엔
90%의 대중적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뭔가 바르게, 조금은 덜 부패하게
해보려는 민주당 정부를 이 나라의 신문(인)들은 그냥 두질 않았다. 민주당 정
부가 이승만이나 박정희같이 신문(인)에 대해서 탄압과 ‘금일봉’을 넉넉히 그
리고 적시에 처방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그리고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진 군부 독재 3대에 걸
친 30년 간, 이 나라의 높고 낮은 자리의 언론(인)들은 또 얼마나 입이 마르도
록 그들에게 아부를 일삼아 왔는가.
우리 나라의 신문은 역대 정권과의 관계와 존재 양식에서 ‘무법’적인 강한
정권에겐 한없이 약하고 총칼을 차지 않은 문치성(文治性) 정부에는 폭력적으
로 포악했다. 같은 하나의 정권에게도 양면적으로 대응했다. 그 권력 집단이 눈
을 부라리면 언론(인)은 두 손 비비면서 정권 찬송가를 노래했다. 칭송 대상의
신세가 기울기 시작하면 비방과 매도를 일삼았다.
정권의 흥망성쇠가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되풀이된 동일한 현상은 그것만이 아
니다. 새로 들어선 정권마다 “청렴 결백 정의”를 외쳤다. 그 속죄양으로 수많
은 앞 정권의 권세가들이 형무소로 가고, 더 많은 감투가 굴러 떨어졌고, 더더
욱 많은 사직서가 제출되었다. 각 분야에서 자기 비탄과 반성의 소리도 심심치
않게 발표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현상이 역시 변함없이 되풀이되었다. 언론사 사주, 간부, 기자
들 중에는 형무소엘 갔다거나 감투를 벗었다거나 한 사실은 들은 일이 없다. 박
정희와 전두환을 세종대왕 급으로 신격화한 언론인들 중에서 자기 반성의 글을
썼다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고, 부끄러워서 사표를 내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말
을 더더구나 들어 본 일이 없다.
이만하면 철저한 기회주의자라는 악평을 들을 만도 하다. 전형적인 전천후적
아세곡필이라고 말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제 언론은 달라져야 한
다. 사주는 과거에 언론 자유 운동을 이유로 쫓아낸 기자들을 무조건 복직시킴
으로써 속죄의 일단을 입증해야 한다. 언론인과 기자들은 뇌물과 촌지없이 월급
으로 살아갈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 생활 수준을 낮
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문 기자들이 지금의 생활 수준을 그대로 지키고 지금
의 소비 형태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들이 말끝마다 부르짖는 ‘사회의 목탁’
도 민주 언론의 대변자도 될 수 없다.
이 모든 일을 누가 추진할 것인가? 나는 다름 아닌 언론노동조합이 바로 그 일
을 밀고 나갈 주동 집단이라고 믿고 있다. 과거의 상태와 다른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깨어 있는 언론노조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레,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