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할머니의 손녀

제 목
첨삭-할머니의 손녀
작성일
2000-03-8
작성자

(1) 작은 아이일 때 난 들길을 헤매는 염소처럼 종일토록 들판을 누비며 나물을 캐
고 꽃을 따서 시계랑 목걸이도 만들고 왕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다녔다.
(2) 해질 무렵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며 말라 비틀어진 나물 바구니를 들고 집으
로 향하곤 했다.
(3) 엄마의 꾸지람.
(4) 할머니의 자애로운 감쌈
(5) 난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당연한 대물림처럼 작은 내게 길들여진 일상이었
다.
(6) 어느 날 돌연한 할머니의 죽음 앞에 덜덜 떨며 도랑에 앉아 망연히 꽃상여의 긴
만기 행열을 보며 느낀 죽음의 아련한 아픔.
(7) 할머니의 영정 앞에 아침마다 밥과 물을 담아 놓는 엄마의 등 뒤에 숨어서 본 할
머니의 영정.
(8) 난 무어라 감지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들길을 쏘다녔다.
(9) 손녀가 캐온 나물이 고기보다도 더 맛있다고 드시던 할머니가 안 계신 공간.
(10) 언제나 할머니 치마 속에서 사랑으로 응석부리던 나.
(11) 학교에 들어 가고 사춘기를 맞고 그리고 이렇게 커다랗게 큰 아이들의 엄마인
내가 한없이 흔들릴 때 자애로우신 할머니의 영혼은 언제나 날 무명 치마 폭 속에 감
싸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12) – 애기야!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애기야, 너를 잃지 말아라.
– 세상은 그래도 향유할 가치가 있는 것이란다.
– 얻고자 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상처가 깊고 자학이 심할수록 늪 속에서 헤어
나지 못하고 그것들로 인한 아픔의 열병이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실감을 가져다 준
다 해도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란다.
(13) 아련한 할머니의 체취.
(14) 언제나 내 가슴 속에 깊이 자리했던 내 할머니의 환영같은 그리움.
(15) 스산하고 황량한 들녘에 서면 난 할머니의 작고 여린 손녀의 영혼이 되어 한없
는 그리움에 빠집니다.
(16) 나물 바구니를 든 작은 영혼이 되어.

(고친글) 할머니의 손녀

(1) 아주 어렸을 때 풀어 놓은 염소처럼 나는 종일토록 들판을 쏘다니며 나물을 캐
곤 했다. 꽃을 따서 시계랑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왕관을 만들어 머리
에 쓰고 다니기도 했다. (2) 그러다 해질 무렵,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깜짝 놀
라 말라비틀어진 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집어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3) “이노무 지지배, 워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니다가 이제사 겨들어 오는겨! 할 일
이 월매나 밀렸는디…….”
(4) “놔둬라. 조게 뭘 알긋냐? 애들이사 다 그렇지.”
엄마가 야단치시면 언제나 할머니가 나를 감싸주셨다.
(5) 그리고 당연한 대물림이나 되는 것처럼 다음 날이면 언제 혼났냐는 듯이 엄마 몰
래 또 들판으로 달아났다.

(6)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무서
워 덜덜 떨며 도랑 둔덕에 앉아 마당에 놓인 꽃상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긴 만기 행열이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야 비로소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느낌
이 들어 눈물이 나왔다.
(7) 아침마다 엄마는 할머니 영정 앞에 밥과 물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엄마 등 뒤
에 숨어서 할머니 사진을 보았다. 할머니는 옛날처럼 변함없이 나를 보고 계시건만 할
머니 냄새며 할머니 목소리는 내 곁에 없었다.
(8) 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허전하여 또 들판을 쏘다녔다.
(9) – 할머니는 내가 캐온 나물이 고기보다도 더 맛있다고 하셨는데…….
(10) – 치마 속에 뭘 항상 숨겼다가 나에게 주셨지.

(11)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를 지나 나도 이제 엄마가 되었다. 커
다란 우리 아이들을 키우다가 한없이 흔들릴 때면 돌아가신 할머니가 더욱 보고 싶
다. 나도 할머니처럼 무명 치마폭 속에 우리 아이들을 감싸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을까?
(12) – 얘들아!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아,
–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란다.
– 욕심이 크면 클수록 상처가 깊어지지.
–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라.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단다.
– 세상을 모두 잃은 것처럼 가슴 아파도 너를 잃지 말아야지. 용기를 내라.
– 사노라면 세상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13) 아련한 할머니 냄새처럼 (14) 언제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15) 이맘 때 스산하고 황량한 들녘에 서면 난 아직도 할머니의 손녀
인 것 같다. (16) 옛날처럼 나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작고 여린 손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