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놀이’를 통해 익히는 논술
1997년 4월 어느 교육 잡지(새교육인가?)에 실렸던 글인데, 우연히 노트북에서
발견했어요. 아직도 유용한 것 같아 올립니다.
‘대화 놀이’를 통해 익히는 논술
한효석/경기 부천고 국어 교사
■ 논술 시험의 배경과 출제 방향
대학 입시를 마치 전쟁 치르듯하던 분위기가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대학
별 고사에 논술만 남으면서 ‘공무원 출근 시간 조정’이니 ‘수험생 수송 대책’
같은 난리를 치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논술이 당락을 결정한
다’는 명제 속에 지금 각 학교 교사·학생·학부모들은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돌이켜보면 논술이라는 말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던 기성세대들이 어느 날 갑
자기 학생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라고 하였다. 물론 학
생들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아무 준비없이 방향도 일러주지 않고 학생들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넣고, 험
한 절벽을 기어올라온 놈만 사자 새끼로 받아준다는 식이다. 결론적으로 기성세
대는 지난 3년간 논술이라는 이름을 빌려 또다시 약육강식하는 경쟁터를 제공한
셈이다.
원래 논술은 세상이 과거의 대량 생산 체제에서 벗어나면서 탄생하였다. 기
술 혁명과 정보 사회가 획일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다행이랄까,
기성 세대의 무심함 속에서도 학생들이 세태 변화를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교
사보다 더 적극적으로 논술에 적응하고 있다.
교사는 농경 사회 방식으로 모자를 똑바로 쓰라고 강요하지만, 학생들은 모자
를 머리에 쓰는 물건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호주머니 소품으로, 방석 대용으로 용
도를 넓히고 있다. 말하자면 기성세대가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해야 마음 편했던 것과는 달리, 학생들은 이리저리 재보며 논술 답안처럼 다
양하게 살고 있다.
출제 교수, 채점 교수, 학부모들도 세태에 따라 변했으며, 변하고 있다. 예컨
대 올해로 네 번 치른 논술 고사의 성격이 점점 논술답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이제는 학생들이 논술 시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논술 평가
기준을 ‘이해’와 ‘표현’으로 나눈다면, 논술은 말 그대로 수험생의 ‘표현’에 더
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논술 문제가 우회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수험생이 출제 의
도를 파악할 수 없다면 수험생의 사고와 표현 수준을 제대로 변별할 수 없을 것
이다. 과거에는 어려운 용어로 학생들을 ‘이해’ 수준에서 묶어 놓았는데 올해
는 어휘 수준을 한껏 낮추었다. 다시 말해 수험생들이 충분히 이해하여 자기 나
름대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둘째, 지금 각 대학에서 연중 수시로 채점 기준과 우수 답안을 공개하고 있
다. 과거에는 중·고교에서 논술 평가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논술 시험은 원래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졸업자에게 요구하는 최저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
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논술 시험 출제와 채점에 현직 교사가 참여해야 한
다. 안되면 대학마다 그해 치른 우수 답안지를 공개해야 여러 사람들이 믿을 것
이고, 대학간의 채점 차이를 좁혀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적 평가 기준이 확실해야 초·중·고 교육의 방향이 바로잡히기 때문이다. 초·
중·고 교육의 방향이 입시 논술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지금 각 대
학에 퍼지고 있어 고무적이다.
셋째, 수험생이 서술해야 하는 원고량이 점점 늘고 있다. 논술 1천자 안팎으로
는 정상적으로 성숙한 수험생의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평가하기가 어렵
다. 지금까지는 수험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보다는 채점자의 작업 능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 대학에서 요구하는 원고량이 점
점 늘고 있다. 앞으로 대학에서 여건이 무르익는 대로 2천-3천자를 요구하여 수
험생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넷째, 고등학생들에게 우리의 사회 현실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고 있다. 과거에
는 관념적인 문제에 국한하여 의도적으로 ‘사회 비판’을 외면하였다. 한 번 생각
해 보아야 할 ‘도시 빈민’ ‘인권 유린’ ‘민주화’ ‘정경 유착’ ‘노조 탄압’ ‘국가
보안법’ ‘군사 풍토’ 같은 문제를 아직도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삐삐 착
용’ ‘학생의 자세’ ‘세대차’ ‘독서의 의의’ ‘국산품 애용’ ‘국위 선양’ ‘충효 정
신’과 같은 도식적인 문제에서 벗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학교 교육 목표에 접근
하여 건전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논술 시험이 지난 4년 동안 이렇게 변하고 있는 동안 일선 교사들은 학생들에
게 논술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4년전이나 지금이
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논술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냐” “그 많은 글을 언제 다 봐주냐” “나는 국어 교
사가 아니라서 논술하고 거리가 멀다” “나는 중학교 교사라서 논술을 알 필요가
없다” “우리 학교는 논술이 필요한 학생이 하나도 없다” “나는 원래 글재주가 없
다” “글을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른다” “우리 학교 애들은 돌머리라서 아무리 해
도 안 된다”
이렇게 부끄러운 발언은 또 없다. 이 말은 교사이면서 교사이 기를 포기하는 발
언이다. 논술은 궁극적으로는 아무나 가르칠 수 있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다. 학생들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을 논리적으로 늘어 놓아 상대방을 이해
시키고 설득하자는 데 철학과를 졸업한 교사만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핑계
일 뿐이다.
또 논술이 국어 교사나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한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한 인격체로 성장하기까지는 수많은 교사의 협
력과 조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라에서 정한 교육 과정에 음악도 넣고, 기술도
넣고, 국어도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술을 ‘사람 사는 이치’로 받아들이지 않
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얄팍한 요령이나 재치
있는 기교에서 벗어나, 모든 교사가 동참해야 하는 통합 교과로 받아들여야 한
다.
매사에 비판적이던 교사, 불평 불만이 많았던 교사, 아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
하지 못해 자꾸 아이들에게 되묻는 교사가 논술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이며,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여러 교과에서 응용할 수 있는 논술 학습법 (1)
■ 한 문장을 뒷받침하며 시작하는 논술 학습
어느 교과 교사든 자기 교과 각 단원에서 학생들이 한 번 짚어봐야 할 내용을
찾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 한 문장에 되도록 한 가지 내용만 담되, 상식적
인 결론이어야 한다. 되도록 평서문으로 정리한다. 의 예문을 참고하여
각 교과에서 핵심 내용을 100개쯤 뽑아보자.
예문 1.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다.
예문 2. 현대 사회는 인간적인 정을 무시하는 편이다.
예문 3. 기성 세대는 청소년들의 개성을 살려 주어야 한다.
예문 4. 똑같은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행동도 비슷하다.
예문 5. 일본을 이성적으로 보아야 한다.
예문 6. 민주주의는 비교적 이상적인 제도이다.
예문 7. 다수결이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예문 8.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예문 9.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한다.
예문 10. 청소년은 발전 가능성이 큰 사람이다.
예문 11. 공교육이 학생들의 개성을 죽이고 있다.
예문 12.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예문 13. 전두환, 노태우는 나쁜 사람이다.
예문 14. 고아 해외 입양을 나쁘게 봐서는 안 된다.
예문 15. 흥선대원군은 개혁적인 인물이다.
예문 16. 컴퓨터가 현대 문명을 좌우하고 있다.
예문 17. 산성비는 서서히 피해를 준다.
예문 18. 학벌을 따지면 사회가 병들기 쉽다.
예문 19.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예문 20.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
뽑아 놓은 문장을 16절지(A4 용지)에 다섯 개쯤 인쇄하면 교사가 아무런 설명
을 하지 않고 고등학교 한 반 학생들과 한 시간 작업할 수 있는 양이다. 중학
생이라면 다섯 개쯤 인쇄하고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학생을 위해 그 다섯 개에
대해 10분쯤 설명한다. 나머지 시간은 학생들 시간으로 돌린다. 그러나 배경
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학생들이 아는 대로 쓰게 하고, 교사는 되도록 아무런 설
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유인물을 한 장씩 나눠주고 그 한 문장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도록 또다른 문장을 한두 개 더 뒷받침하라고 지시한다. ‘뒷받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교사가 설명해줘야 한다.
뒷받침을 설명해도 학생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싶으면 ‘대화 놀이’를 통해 뒷받
침하는 법을 이해시킨다. 에 있는 예문 1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곳이
다’를 가지고 ‘대화 놀이’를 해보자.
예문 1을 뒷받침해야 하는 사람은 학생이고, 뒷받침할 내용을 끌어내는 사람은
교사이니 배역이 바뀌면 안 된다. 학생이 말한 것 중에서 교사가 한 단어를 꼬집
어 자꾸 되물어야 집중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학생 : “얘,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래.”
교사 :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학생 : “그럼, 사회는 여러 사람이 조화를 이룰수록 잘 돌아가거든.”
교사 : “조화를 이루다니?”
학생 : “크고 작은 톱니 바퀴가 서로 맞물고 돌아가는 것처럼 말야.”
교사 : “아, 그렇구나.”
이렇게 주고받은 대화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반복하고 학생의 말만 모아 놓는
다.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래. 사회는 여러 사람이 조화를 이룰수록 잘 돌
아 가거든. 크고 작은 톱니 바퀴가 서로 맞물고 돌아가는 것처럼 말야.”
이것을 ‘글’로 정리하면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서술한 글 한 덩어리(단락)가
완성된다(이런 단락 너댓 개를 모으면 논술 글 한 편이 될 수 있다).
‘사회는 혼자 살 수 없는 곳이다. 사회는 여러 사람이 조화를 이룰수록 잘 돌
아가기 때문이다. 이를 기계에 비유한다면 크고 작은 톱니 바퀴가 서로 맞물고
돌아가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뒷받침이란 처음 문장 하나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려고 다른 문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덧보탠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기 말에서 꼬집을 수 있는
의문을 미리 설명하여 더 이상 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머지 문제는 학생들끼리 둘씩 짝지어 서로 대화하여 정리하라고 지시한다.
학생들이 대화에 익숙지 않을 때는 학생 배역을 맡은 사람에게 ‘왜냐하면, 가
령, 다시 말해, 예를 들어, 만약에, 말하자면’ 따위의 접속어를 붙여가며 이야기
하도록 한다.
예문 5 ‘일본을 이성적으로 보아야 한다.’를 가지고 연습해 보자.
학생 : “일본을 이성적으로 보아야 해.”
교사 : “이성적으로 보다니?”
학생 : “(예를 들어) 일장기를 불태우는 것은 너무 감정적이야.”
교사 : “감정적이면 어때?”
학생 : “(만약에) 감정으로만 행동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를 전혀 이해하
려 하지 않을 걸.”
교사 : “이해하지 않으면?”
학생 : “(말하자면) 결정적인 순간에 국제 여론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
다는 것이지.”
교사 : “그래서?”
학생 : “(다시 말해) 우리만 손해보는 일이 생길 수 있어.”
교사 : “아, 그렇구나.”
이 내용을 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가 국
제 여론에 밀려 우리만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이 끝나기 15분 전에 다섯 문장을 학생들과 함께 확인한다. 교사는 시
간을 잘 안배하여 몇몇 학생의 글을 임의로 뽑아 그 자리에서 읽고 바로 잘잘못
을 평가해준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교사가 낭독한 뒤 학생들의 다수결로 뒷받침
수준을 평가해도 된다.
여유가 있으면 교사가 시험지를 모두 걷어 동그라미, 세모, 가위로 표시해서
학생에게 돌려준다. 그렇게 해도 제대로 정리한 학생들이 다른 학생의 잘못을 평
가해 줄 수 있다. 이런 연습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학생들끼리 서로 시험지를 바
꾸어도 아주 정확하게 평가한다. 학급 친구가 매긴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때는
교사가 한 번 더 확인하거나, 또다른 학생이 한 번 더 평가하게 해도 좋다.
이런 연습을 여러 번 한 뒤에 뒷받침 문장을 서너 개, 대여섯 개 붙이는 식으
로 양을 늘려 나간다. 대여섯 문장 덧보태는 연습이 끝나면, 제시한 문장에 ‘첫
째, 둘째’를 붙이도록 하고 그 첫째와 둘째에다, 앞서 연습한 대여섯 문장 뒷받
침하기를 응용하여 연습한다.
예문 2 ‘현대 사회는 인간적인 정을 무시하는 편이다’를 가지고 연습해 보자.
학생 : “현대 사회는 인간적인 정을 무시하는 편이야.”
교사 :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이유를 두 개만 말해 볼래?”
학생 : “첫째, 물질적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이야.”
교사 : “그리고?”
학생 : “둘째, 사회에서 생산성과 능률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지.”
교사 : “그래? 그러면 그 두 개를 좀더 자세히 말해 봐.”
학생 : “물질적 가치를 우선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
한 문장에 다른 문장을 뒷받침하는 연습을 몇 번쯤 하고, 나머지 문장들은 일
년 동안 짬짬이 학생들에게 숙제로 내줘도 좋다.
일년 내내 평가할 시간이 없으면 100문장을 모두 인쇄해 주고, 교사가 생각한
뒷받침 문장을 모범 답안으로 함께 주어 학생이 혼자(또는 서너 명이 모여) 연습
할 수 있도록 해도 좋다.
논술 문제에도 정답이 있다. 근거를 대고 상대방을 설득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받으면 그것이 모두 정답이다. 그러므로 거창한 지식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보편화하는 재주가 ‘논리력’이다.
이 논리력을 키우려면 학생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자기 주장의 잘잘못을 찾아 객
관적으로 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사가 마음을 열고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
울이기만 하면 교과에 상관없이 논술을 가르칠 수 있다.
“어, 네 주장이 그렇다구?”
“왜 그렇지?”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나?”
“어떡하면 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어떡하지?”
“그런 경우가 있을까?”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니?” 하고 묻기만 하면 아이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정답으로 접근해간다. 논술은 서정을 담는 글이 아니고 합리를 담는 글
이라서, 윽박 질러가며 가르친 아이들은 논리를 펼 수 없다.
논술은 시험 방식일 뿐이지 과목이 아니므로, 국어나 철학 교사의 영역에 머물
러서는 안 된다. 모든 교과의 교사가 참여하여 한 학생을 인격체로 다듬어가고
그 결과가 논술로 드러나야 한다.
‘교육 개혁, 학습 혁명’을 내세우지 않아도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설명하던 획
일적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지금보다 좀더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기
만 하면 아이들의 논리력은 저절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