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다녀와서 1-노회찬

제 목
평양을 다녀와서 1-노회찬
작성일
2000-10-30
작성자

이름 : 노회찬 ( ) 날짜 : 2000-10-30 오전 1:17:23 조회 : 116

심장에 남는 사람들

평양을 다녀와서 1
(노회찬 민주노동당 부대표)

역사의 기록을 위해, 경험의 공유를 위해 이 글을 쓴다.
2000년 10월 9일 오후 1시 35분,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기념행사 참관단 42명을 태운 고려항공 TU138기는 김포공항을 출발하였다. 42명의 방북대표단은 구성부터 다양했다. 통일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여성운동가, 종교계, 학계, 언론사인사 등. 그러나 대다수가 남쪽 체제와 정부에 대항하여 감옥을 마다 않고 싸워온 투사들이었다. 2000년 10월 9일 이 투사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남에서 북으로 가는 최초의 남쪽 사람들이 되었으며 다음날은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행사를 합법적으로 참관하는 최초의 남쪽 사람들이 되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걸상띠(안전벨트)를 매라는 여승조원(여승무원)의 방송을 들으며 남쪽 관할에서 벗어나 있음을 실감했다. 실제 국제법상 항공기는 소속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준영토로 간주되는 만큼 남쪽 대표단 42명은 고려항공기에 오르는 순간 이미 남북의 분계선을 넘은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내는 내내 숙연하고 조용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평양행의 성사여부가 불투명했던 서울의 사정과 곧 도착하게 될 평양의 일들이 엇갈리면서 모두들 깊고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방북 여부와 방북자 명단을 최종적으로 확정한 것은 10월 8일 오후 9시경이었다. 결정이 늦어진 것은 권영길 대표의 방북이 재판 계류 중이라는 부당한 이유로 불허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지도부는 실리를 택했다. 남북 정당교류와 정치협상 등 통일정국에 있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입지와 역할을 제고시킬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선 이번에 방북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밤 10시부터 정부종합청사 통일부 회의실에서 심야의 방북교육이 있었다. 내용은 주로 무례하고 철없는 금강산 관광객에게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남한, 북한이란 말 대신 남쪽, 북쪽이라 불러달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시대의 변화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세를 거르는 작은 역류는 늘 있게 마련인 법인지, 마지못해 방북을 허용한 김대중 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옹졸하였다. 민주노총 이수호 사무총장을 비롯한 몇 명의 인사는 7일 이전까지 방북신청서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포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방북을 포기해야 했다.

평양까지 비행거리는 5백31km. 오후 2시 54분 비행기는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남쪽 대표단은 기내에서 한완상 상지대총장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이인모노인을 북쪽으로 보내고, 김영삼정부의 통일부총리로서 사실상 ‘햇볕정책’을 처음 추진한 인사인 만큼 일부 이견도 제기되었으나 만장일치로 추대된 것이다. 비행기에서 트랩을 내려가는 순서도 자체적으로 정했다. 그러나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 북측이 새롭게 짠 명단이 전해졌다. ‘민주로동당’이 1순위였다. 벤츠승용차도 1호차였고, 숙소, 연회장의 테이블 배치 등 모든 의전에서 민주노동당 대표단은 정당 우선의 예우를 충분히 받았고 다른 단체 대표들도 이를 인상깊게 받아들였다.

북측 실무대표는 “초청에 응한 유일한 정당이며, 남쪽 근로계층을 대변하는 유일한 정당이라 특별한 대우를 하고 싶으나 함께 방북한 다른 단체들을 고려해 더 이상의 배려를 못하게 되었다”며 양해해 줄 것을 당부했다.
순안공항에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5백여명의 주민들이 꽃(조화)을 흔들며 “조국통일”을 외치고 있었다. 꽃다발을 든 화동들도 나와 있었다. 반가움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이들은 오전 10시부터 나왔으며 우리 일행이 김포공항에서 4시간 여 정부당국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못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며 장시간 기다렸다고 한다. 공항에서 단체별로 기념사진을 찍게 했다. 방북단은 이 사진을 다음날 로동신문 제 4면에서 볼 수 있었다. 모두 6면인 10월 10일자 로동신문은 남쪽 방북단의 도착 소식과 공항영접 인사, 방북단 명단을 사진과 함께 1/2 면 크기로 다루고 있었다.

숙소는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위치한 봉화리 초대소였다. 대동강변에 위치한 이 초대소는 건평 2백여평의 별장식 단독건물 수십 채로 이뤄져 있었다. 부총리급 이상의 국빈을 모신다는 이 초대소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방북 첫 식단은 오리향구이, 잉어회, 청포종합랭채, 김치, 장아찌, 장사귀, 흰밥, 섭조개구이, 고기남새완자탕, 풋배추새우살찜, 수박, 인삼차 등이었고 술은 룡성맥주, 평양포도술 등이 제공되었다. 식사 후 자기 소개와 방북소감을 밝히는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좋은 식사와 숙박시설은 고맙지만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평양에 와서 평양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서울생각이 더 많이 난다. 모두 돌아가서 해야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여기서 만들어 가지 않는다면 이번 방북은 관광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평양당국은 남쪽 방문단이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행사에 참관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듯 보였다. 도착 첫날부터 며칠간 방북대표단의 일정을 놓고 북측 관계자들과 실랑이가 계속됐다. 평양측은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행사 참관 외엔 최대한 정치색을 배제하려했다. 작년 민주노총 축구대표단의 방북이나 최근 백두산 관광단의 방북 등에서 예외 없이 요구되었던 김일성주석 동상 참배는 아예 일정에서 빠져 있었다. 만경대의 김주석 생가 방문이나 김주석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방문도 ‘금지’되었다. 유관 단체와의 만남 주선 요구에도 소극적이었다.

남쪽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조선로동당행사에 참석시키는 것이 현재의 남북관계가 허용하는 최대한의 공세이며 그 이상의 무리는 남북관계의 후퇴를 야기시킬 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역력했다. 남쪽의 문제를 남쪽의 처지와 시각에서 바라보는 예로 기록될만 했다. 나중에 그간의 대남사업이 자신들 중심으로, ‘내리먹이기 식’으로 추진된 것을 이젠 지양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남쪽 사회의 변화는 남쪽 민중이 주도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필자에겐 북의 이런 태도변화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