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를 쓰며
나이를 먹으면서 심신이 예년 같지 않습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뼈마디가 여기저
?기 쑤시지요. 어쩌면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심심을 더 혹사시켰을지 모릅니
?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낡고 병든 몸에 훈장처럼 나이만 남습니다. 그때쯤에야
?사람들은 ‘너도 나이를 먹는다.’고 한 선배들의 지적을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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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습니다. 은행에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준 것은 기억
?이 나는데, 그 뒤로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옷이란 옷,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지요. 공연히 짜증이 났습니다. 그동안 우산 하나 잃어버
?리지 않고 살았지요. 그런데 신분증 같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기억조차 못하
?다니, 그런 내가 실망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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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뒤 잃어버렸던 주민등록증을 우편배달원이 전해주었습니다. 은행 창구에
?서 주민등록증을 되돌려 받고 은행을 나서다가 문 앞에서 흘렸던 모양입니다. 땅
?바닥에 굴러다니며 다 헤졌습니다. 비에 젖었었는지 사진과 글씨가 잘 보이지 않
?았습니다. 그 처량한 모습이 나이를 먹어가는 나를 상징하는 것 같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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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든 크든 사고를 당하면 일단 과거와 달라집니다. 작은 흉터만 남을 수 있
?고, 손발을 예전처럼 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받
?아들이지 못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왜 그러냐는 식입니다. 말하자
?면 자신이 사고를 당했고 이제는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
?니다. 옛날처럼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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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나이 먹으면서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고,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따지
?고 보면 짜증낼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제 그 전만큼 기억하
?지 말라,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겨보지 말라, 이게 세월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
?었습니다. 물론 좀더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약속을 기록하고 돋보기를 써서 모자
?란 곳을 보완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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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어느 소설가가 젊은이들에게 충고하였습니다. 20대는 실패하며 노력하
?는 시기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쌓아나가야 비로소 40대에 가서 성패가 드러난다
?는 겁니다. 20대에 성공하기를 바라면 안 되고 바랄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
?즘 같은 시기일수록 젊은이들이 인생을 길게 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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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따지면 노후는 그 이전 시기를 받아들이며 마무리하는 시기여야 할 겁니
?다.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지요. 그러므로 나이
?를 먹을수록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
?내 몫은 여기까지.’하며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오히려 남은 인생
?을 좀더 여유롭게 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