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 – 파에톤의 무모함

제 목
첨삭 – 파에톤의 무모함
작성일
2004-08-20
작성자

파에톤의 무모함

구창기(광주서석고 3)

성경을 보면 인간은 신의 모사체로 표현되어 있다. 신과 비슷하기에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오래 전부터 인간은 신에게 가까워지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의 샤먼이라든지 바벨론의 탑, 현재의 여러 종교 등에서도 그런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는 무협지의 주인공들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본래 자연을 두려워하며 살았었다. 원시인들은 먹을 것도 자연의 베품에 의지했고 그들의 생명은 자연으로부터 항상 위협받았었다. 시간이 흘러 인간은 자연에 협력하여 살게 됐다.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조금씩 자신들에게 이롭게 이용했다. 그리고는 자연에게 더 베풀어주기를 빌었다. 자연을 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파에톤은 이런 시대에 살았다. 이런 시대에서 파에톤은 신을 닮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의 파에톤은 고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신화적 세계에서는 자연은 신이었고 우리 인간은 나날의 양식을 신이 준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라 여긴다. 모두가 아폴론의 이륜차, 즉 과학 기술에 올라섰다. 이 새로운 이륜차는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했으며 더 이상 신을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신을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하였고 인간의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대하였다. 현재의 시대에서의 파에톤은 바로 이 자연의 정복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도구로 전락한 신은 우리 인간에게 제우스의 번갯불을 던지려 한다. 모든 인간이 파에톤의 되어 아폴론의 이륜차에 오르자 그 이륜차는 궤도를 이탈하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다. 대지의 여신에게 농약을 먹이고, 네레우스에게 석유와 쓰레기 더미를 안겨주었다. 제우스에겐 스모그를 선물하고 샘의 요정들에게 폐수를 퍼부었다. 오존층에도 구멍을 내고 숲을 마구잡이로 베어내 연료로 쓴다. 인류의 오만함과 무모함이 자연과 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더 이상 파에톤은 고매하다고 할 수 없다. 현재의 파에톤은 오만함과 무모함의 상징이며 파괴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파에톤의 무모함이 결국 그를 죽음에 몰아넣었듯이 인류의 무모함도 결국 인류, 아니 모든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최근에 체세포만으로 인간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2) 인간의 신을 닮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결국 신의 영역이라는 인간 창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하지만 이 새로운 아폴론의 이륜차가 또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는 더욱 두려워진다. (4) 위에서도 말했듯이 무분별한 개발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5) 이런 인간에 대한 경고로 최근에는 The day after tomorrow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우리의 가슴을 섬찟하게 한다. (6) 따라서 자연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그런 오만함은 버리고 자연과 공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7) 다시 말해서 서양의 자연관과 동양은 자연관을 결합시켜야 하는 것이다. (8) 물론 개발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9) 그러므로 리우 환경 회의의 예처럼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10) 그래야만이 인류는 제우스의 번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강평)

이 글 제시문으로는 파에톤 이야기가 주어졌다. 파에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클리메네의 아들이다. 파에톤은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를 만나는데, 아버지가 소원을 묻자 태양신의 전차를 몰고 싶다고 대답한다. 파에톤은 자기 소원대로 전차를 몰지만, 말을 다루지 못해 하늘 궤도를 벗어나 땅을 불태울 상황에 놓인다. 이에 제우스가 번개를 쳐서 파에톤을 강물에 떨어뜨린다.

출제자가 제시문을 주는 것은 수험생이 논술글을 쓸 때 참조하라는 뜻이다. 즉, 주어진 논제를 평소에 수험생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어도, 이 시험장에서 주어진 글을 참조하여 이것저것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시문은 갈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이지, 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제시문을 읽고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떠나야지, 이정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구창기 학생은 다섯 단락 중, 마지막 결론 단락에서 ‘자연과 공존, 동서양 자연관을 결합, 지속 가능한 개발’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마무리한 것은 그 앞에 있는 네 단락에서 파에톤을 인류로, 이륜차를 개발(또는 과학 기술)로 빗대어 인류가 오만하고 무모하게 자연을 개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창기 학생은 개발을 하더라도 되도록 자연 파괴를 하지 말아야 하며, 인류가 자연을 도구로만 여기지 말고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 단락에서 개발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개발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서론-본론 단락 어느 곳에라도 개발을 왜 안 할 수 없는지, 개발이 지나치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도 주어진 제시문에 매달려 서론과 본론에서 장황하게 ‘신, 인간, 자연’의 관계만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나그네가 갈 길이 먼데도, 이정표를 바라보며 글씨가 크다는 둥, 이정표를 나무로 만들었다는 둥, 이정표를 더 높이 달아야 한다는 둥 본질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과 같다.

차라리 결론 단락에 있는 문장에서 (1), (2) 문장을 서론으로, (3)~(5) 문장을 본론으로, (6)과 (9)문장을 결론으로 하여 글을 구상하는 것이 낫다.

출제자가 파에톤 이야기를 제시문으로 준 것은 파에톤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오늘날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험생은 파에톤을 개발, 기술, 자연, 환경 같은 말에 빗댄다면 자기가 빗댄 내용(본질)에 매달려야지, 파에톤(현상)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많은 수험생들이 출제자에게 제시문을 해설하고 이해시키려 한다.

국어 시험은 남이 쓴 글을 정확히 이해하였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나 논술 시험은 주어진 글을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지를 평가한다. 말하자면 아직도 국어 훈련에서 논술 훈련으로 넘어오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