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삭 – 도전과 한계
도전과 한계
선태은(광주서석고 3)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해 왔다. 불의 발견부터 게놈 프로젝트까지 각각의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보다 편리한 삶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이런 진보에 하나둘 걸림돌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 파괴나 인간 소외 의식 들이 그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이런 모습은 ‘파에톤 신화’에서 파에톤과 일맥상통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일맥상통한 면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의미도 제시할 수도 있다. 그 제시하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 의미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 논의해 보도록 하자.
‘파에톤 신화’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다. 원시 농경 사회에서는 ‘파에톤의 신화’가 신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데 사용된다. 자신들 노력의 대가가 신의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유 재산으로 인해 계급이 생겨난 시기부터 중세까지는 원시 농경에서의 신적 권위가 지배자에게 위임되고 이를 과시할 수 있게끔 해석되었다. 근세에서는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으로 지배자 중심의 해석에서, 인류 전체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즉 근세의 급속한 발전이 파에톤의 도전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이렇게 ‘파에톤의 신화’는 다양하게 해석되었고, 또한 특별한 목적성을 띈 채로 이용되었다.
현대에서 ‘파에톤의 신화’는 종결부에 초점이 맞춰진다. 바로 파에톤의 비극적 죽음 말이다. 하나하나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먼저 파에톤을 현대인으로, 신들을 자연의 순리로 상정하고, 이를 전제로 삼을 수 있다. 그리로 이 전제를 바탕으로 파에톤이 아폴론의 마차를 몰고자 했던 그 행위를 현대인들의 과도한 환경 개발로 상징할 수 있고,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파에톤의 죽음을 인류의 종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파에톤 신화는 현대인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런 ‘파에톤의 신화’를 경고로 받아들이고, 파에톤의 죽음과 같은 비극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동과 인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런 요구들을 현대 철학자들이 연구해 왔다. 지속 가능한 개발, 하노이의 탑에서 생명 존중의 윤리 등이 그 예이다. 이렇게 논의되고 연구된 이론들은 환경을 보존하는데 많은 영향력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연구외에도 한 가지의 인식이 ‘파에톤의 신화’를 바탕으로 요구된다.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파에톤이란 사실을 말이다. 이를 인식해야 우리가 파에톤과 같이 비극적 결말의 가능성이 크고, 또한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의 한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행동이 자연적 순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1) 그 동안 인류의 발전은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형식이었다. (2) 더군다나 근세에서부터 지금까지는 발전 속도가 인간의 제어 범위 이상의 속도였다. (3) 결국 이런 발전이 자연 환경의 파괴와 이로 인해 인류 생존의 위협까지 초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4)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한계성을 인정해야 하고, 이런 한계성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과의 같은 울타리 안에서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파에톤의 신화’가 미래에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기 위한 길은, 파에톤의 도전성을 견지하되, 파에톤이 인식하지 못한 한계성에 대한 인정이다.
(강평)
이 글 제시문으로는 파에톤 이야기가 주어졌다. 파에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클리메네의 아들이다. 파에톤은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를 만나는데, 아버지가 소원을 묻자 태양신의 전차를 몰고 싶다고 대답한다. 파에톤은 자기 소원대로 전차를 몰지만, 말을 다루지 못해 하늘 궤도를 벗어나 땅을 불태울 상황에 놓인다. 이에 제우스가 번개를 쳐서 파에톤을 강물에 떨어뜨린다.
출제자가 제시문을 주는 것은 수험생이 논술글을 쓸 때 참조하라는 뜻이다. 즉, 주어진 논제를 평소에 수험생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어도, 이 시험장에서 주어진 글을 참조하여 이것저것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시문은 갈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이지, 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제시문을 읽고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떠나야지, 이정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선태은 학생은 여섯 단락으로 글을 구조화하였는데, 결론 단락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인정, 파에톤의 도전성을 견지하면서 한계를 인정’과 같은 말로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즉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 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태은 학생도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서론과 본론에서 파에톤의 도전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파에톤이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어떤 문제가 벌어졌는지를 충분히 서술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서론 단락에서 인간이 파에톤처럼 노력하고 투쟁하여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것은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인류가 얼마나 무모하게 환경을 파괴하였는지, 자연의 순리를 어겼는지를 자세히 언급해야 한다.
결국 본론 1인 둘째 단락은 논지와 상관없는 군더더기이다. 파에톤 신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본론 2인 셋째 단락에서는 ‘얼마나, 어떻게’는 언급하지 않아 글의 깊이가 없었다. 본론 3과 본론 4인 넷째, 다섯째 단락에서는 결론 내용과 본론 내용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선태은 학생도 결론 단락에 있는 문장에서 (1), (2) 문장을 서론으로, (3) 문장을 본론으로, (4) 문장을 결론으로 하여 글을 구상하는 것이 좋겠다.
출제자가 파에톤 이야기를 제시문으로 준 것은 파에톤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오늘날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험생은 파에톤을 개발, 기술, 자연, 환경 같은 말에 빗댄다면 자기가 빗댄 내용(본질)에 매달려야지, 파에톤(현상)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많은 수험생들이 출제자에게 제시문을 해설하고 이해시키려 한다.
국어 시험은 남이 쓴 글을 정확히 이해하였는지를 평가한다. 그러나 논술 시험은 주어진 글을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지를 평가한다. 말하자면 선태은 학생은 아직도 국어 훈련에서 논술 훈련으로 넘어오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