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없는 사람 3

제 목
생각없는 사람 3
작성일
2013-01-27
작성자

시민단체 회의는 싫다.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질린다. 진지해도 너~~~무 진지하다.
내가 아는 어느 곳은 중간에 밥을 먹어가며 하루종일 회의하기도 한다. 끝나고 뒤풀이할 때 술은 적게 먹고 이야기는 몇 시간씩 한다. 일도, 사람도 반갑고 즐거운가 보다.
그러나 내가 여러 위원으로 참여하거나 과거 공무원 생활로 미루어보건대 대부분 사람들은 회의가 짧고, 잡담이 길다.
따지고 보면, 간신은 “예”라고 간단히 대답하는 신하이고, 충신은 임금에게 충직하게 대답하여 임금을 질리게 하는 신하이다.

그럼 대한민국 최고 수뇌부가 지하벙커에 모이면 뭔가 다를까? 사극에 나오는 임금과 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책의 장단점을 거론하며 정말 논쟁을 벌일까? 하지만 지하 벙커와 어전에서도 대체로 회의는 짧고 잡담이 길다.

대통령: 북쪽 동향은 어때?
국방부장관 : 럴러럴.. (길게 말한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통령: 잘 대처하고 있지?
장관 : 럴러럴.. (길게 말한다. 잘 대처하는 것처럼)
대통령: 응. (그쪽으로 아는게 없으며, 국방부장관이 잘 대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일이 커지면 문책하면 된다. “잘 대처하는 줄 알았잖아? 근데 이게 뭐야?”하며.)

대통령: 행자부장관! 수재 상황은 어떻지?
행자부장관 : 럴러럴.. (길게 말한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통령: 정부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계획인가?
장관: 럴러럴.. (길게 말한다. 잘 대처할 것처럼)
대통령: 알았어.. 정말 어려운 사람이 빠지지 않도록 제대로 신경쓰고.. (흐믓하다.. 자신이 성군인 것 같다.)
장관: 걱정마십쇼. 한 사람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흐믓하다. 이렇게 자신있게 이야기하여 대통령을 기쁘게 하는 장관도 없다.)

대통령 : 노동부장관, 쌍용차 회사는 왜 그래? 그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나?
장관 : 럴러럴. (길게 말한다. 자기가 잘 처리하는데, 상황이 많이 꼬인 것처럼.)
대통령 : 듣기 싫어!(장관이 보고하는 내용을 잘 모른다. 말이 길어서 어쩐지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장관 : (노동부장관을 거든다) 노동부장관! 그 사람들 빨갱이 같던데.
또다른 장관 :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대통령 : 그럼 노동부장관은 국정원과 검찰하고 협조해서 대처해.
노동부장관 : 예. (짧고 크게 대답한다.)

비서 : 기자들이 벙커로 취재하러 올 시간입니다.
대통령 : 내 점퍼는 괜찮아?
장관 : 선글라스를 쓰시는 것이 낫겠는데요.
비서 : 책상과 복장들 정리하시고요. 김 장관님은 대통령님 옆에서 조금 빠져주세요.
대통령 : 지난 번 사진은 인상이 조금 약해 보이던데, 이번에는 좋은 걸로 내보내.
비서 : 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10분, 상황실 사진 찍는데 10분, 기자들 나가고 제 자리 앉아서)

대통령 : 다른 일은 노트북(유인물)에 있는 걸 각자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기타 토의할 사항이 없나?
김 장관 : 럴러럴. (대통령 칭송)
박 장관 : 럴러럴. (또다른 일로 대통령 칭송)
대통령 : 그래. 그 정도야?(흐믓해 한다. 난 성군이야. )

대통령 : 아참~ 김장관 딸이 이번에 대학 교수로 발령 받았다며?
김장관 : 아~ 예. 그 애가 좀 늦었지요. 흐흐흐.
최장관 : 그래도 그 정도면 아주 늦은 것은 아니지요. 축하해요. (속으로는) 얼라~ 삼성이 아주 대놓고 그 딸을 교수로 꽂아줬군.
김장관 : 대통령님은 요즘도 아침 산책을 하시지요?
대통령 : 아~ 그러려고 하는데, 어떤 때는 못 일어나겠더라구. 그래도 손자가 와서 “할아버지 일어나세요”하면 안 일어날 수가 없지.
박장관 : 지난 번에 보니까 손자가 대통령님을 빼다 박았던데요.
대통령 : 그래? 날 많이 닮기는 했지. 흐흐흐. 박장관님은 요즘 뭐 좋은 걸 드시나 봐요. 얼굴 혈색이 아주 좋아요.
박장관 : 담배를 끊어서 그럴 겁니다.
대통령 : 그거 잘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두 시간 잡담. 점심 때가 되면 밥 먹으러 가자며 지하 벙커 상황 끝.)

(그날 저녁 조중동과 종편) 대통령님이 비상 시국을 맞아 오늘 아침에 지하벙커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장관들과 국사를 논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