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기억한다

제 목
오늘을 기억한다
작성일
2012-11-30
작성자

오늘을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내 얼숲에 묶어놓는다.

김영진
송원재 샘을 비롯한 6명의 교사가 학교를 떠나게 생겼다.
2008년 서울교육감 선거 때 선거에 관여했다고.
오늘 대법원 선고가 내려졌단다.
대법원 확정 판결문은 딱 4음절이었다고.
“기.각.한.다.”
주심 법관이 그 유명한 “신영철” 대법관이셨단다.

교육감 뽑는 데 교사가 관심 갖고 목소리 내면 왜 안 된다는 걸까?
대한민국 참 희한한 나라다.
자기 직종의 수장을 뽑는 데 관여하지 말라?
그럼 누가 관심 갖고 목소리 내야 하는 거지?
교육감 선거 때 교사들 투표권도 박탈하지 왜?

교사들 입 틀어막고 손발 묶어놓고 기껏 뽑아놓은 게 누구던가?
온몸을 비리로 휘감은 그 비리덩어리 공정택 아니었던가.

다시 새겨두자.
폴 발레리가 한 말이란다.
지배권력에게 정치란 이런 것이렷다.

“정치는 사람들이 자신과 분명히 관련된 일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송원재 샘 글 읽으려니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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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 어느 것부터 말해 줄까?”
아내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좋은 소식”
“앞으로는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됐어.”
그러자 눈치 빠른 아내가 대뜸 물었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 날짜 잡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작별인사 드립니다. 갑자기 놀라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내일이 아마도 제가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경황 중에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할 것 같기에 메신저로 먼저 인사드립니다.

내일 오전 10시, 제가 관련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립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공정택 씨와 첫 민선교육감 선거를 치른 주경복 후보를 도왔다는 이유로 기소되었습니다. 공무원인 교사가 선거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고 특정 후보를 도왔다는 죄목입니다.

1심과 2심에서 불행하게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기에, 이변이 없는 한 대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릴 것 같습니다. 더욱이 주심 법관이 지난 08년 ‘촛불시민’들을 빨리 처벌하지 않는다고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압력을 행사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신영철 대법관입니다. 한동안 잊고 살만큼 미루어두었다가 선거철에 맞춰 판결을 내리겠다는 걸 보면, 교육감선거 간여하지 말라고 교사들에게 경고하는 뜻도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교사의 선거 중립… 참 어려운 화두입니다. 외국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우리의 실정법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복업자, 급식업자, 수학여행업자, 학원관계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맘껏 활개치며 선거판을 휘젓고 다니는데, 정작 교육의 중심인 교사들은 서울교육의 수장을 뽑는 선거인데도 족쇄를 채워 꼼짝 못하게 하는 현실이 너무 굴욕스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당시 전교조 서울지부장이었던 저는, 공정택 씨가 당선되면 시장주의 경쟁교육이 본격화된다고 여겼기에, 이를 막기 위해 건국대 교수인 주경복 씨를 민주-시민후보로 추대하고 당선을 위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의 22개 선거구 가운데 강남-서초-송파를 제외한 19개 선거구에서 모두 이겼지만, ‘강남 3구’의 몰표를 넘어서지 못하고 석패했습니다. 득표 차이는 겨우 2만여 표, 서울 유권자 500만에 비하면 정말 원통할 정도로 아쉬운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민주-시민후보가 예상을 깨고 대약진을 하자, 정부와 검찰은 극도의 불안을 느꼈던지 전교조 서울지부 집행부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친인척의 계좌번호는 물론, 15년 전의 이메일 계정까지 뒤졌습니다. 심지어 선거관리위원회에 문의해서 처리한 일까지도 선관위가 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며 범죄로 몰아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선거에 떨어진 후보는 ‘패자불살(敗者不殺)’이라고 수사하지 않는 게 검찰의 불문율이지만, 전교조에 대해서는 예외라더군요. 처음부터 철저하게 정치적 노림수였던 것이지요. 결국 저를 포함해서 전교조 서울지부 집행부 6명이 징역, 또는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교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육감에 당선된 공정택 씨가 선거부정과 매관매직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물러난 뒤, 제 꿈은 결국 이루어진 셈입니다. 곽노현 서울교육감을 비롯한 6개 시도에 ‘진보교육감’이 탄생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기 위해서는 밑거름이 썩어야 합니다. ‘진보교육감’ 6명은 곧, 이 사건으로 내일 교직에서 물러나는 전교조 서울지부 집행부 6명의 목숨 값입니다. 아직 많이 미숙하고 흔들리지만, 교육감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견제하는 것은 우리 교사들의 몫입니다.

4년을 끌어온 사건이 이제 끝납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분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이제부터는 저 자신과,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하지 못했던 아내와 주변의 소중한 분들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나누겠습니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저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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