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는 무식하다
50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 반에 대학가는 애가 한두 명. 남자애들은 철공소에 가거나, 화물차 조수로 갔습니다. 취업이 아니라 입을 하나 덜어내는 식.. 여자 애들은 남에게 주거나 식모로 입주했죠.
한두 대학, 한두 학과 빼고 과별 모집할 때이므로 거의다 정원미달.. 거의 모든 대학이 원서만 내면 합격했습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경제수입을 포기하고 학비지출하는 대학에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죠.
부모대신 다른 사람에게 얹혀사는게 경제적 독립이고, 그러면서도 부모는 극복하기 어려웠지요. 박정희가 죽고나서야 나쁜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은 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잘 가르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나 하였는데, 나중에 동교동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50대는 지금도 무식하죠.. 가스통이나 들고 나옵니다.
우한기
<40대 이상 세대들이 젊은 세대와 달랐던 점>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 노릇할까봐 걱정이 된다.
피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때론 자꾸 옛날 그 나이 적 모습과 비교하곤 한다.
그래 이전 우리 젊었을 적과 지금 젊은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정리하여 멋모르고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일을 경계하고자 한다.
이것은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는 것이므로, 페친들께서 빠진 것을 보충해주시기 바란다.
1. 입시 경쟁이 이리 치열하지 않았다
1) 진학에서 분산이 많았다
일단 고입과정에서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서 우수한 학생 상당수가 상고나 공고 쪽으로 꽤 빠져나갔다. 부산만 해도 부산상고, 경남상고, 부산여상, 경남여상, 선화여상/ 부산공고, 경남공고 같은 우수한 상공계열 고등학교가 많았다. 반에서 5등 이내 아이들 중 상당수가 이리로 빠졌다.
대입의 경우도, 지방 국립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들어갔다.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는 대개가 서울대 진학이었고, 형편 좋은 집안 애들이 연고대를 들어갔다. 성균관대나 한양대로 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그 비슷한 성적 갖고 부산대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참 많았
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였을 터.
자연계의 경우 의대나 한의대가 지금처럼 무조건 최상위권이지 않았다. 지방 국립대 의대는 반에서 10등 이내 아이들도 상당히 들어갔고, 최상위권 아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의 자연대나 공대로 아주 많이 진학했다. 지방 의대나 한의대는 그보다 훨씬 커트라인이 낮았다. 원광대 한의대 같은 데는 반 20등 이내, 지방 사립대 의대는 그보다 더 낮은 성적으로도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이화여대는 예전의 명문이 아니라는 사실. 중앙대 갈래 이화여대 갈래 물어봐라. 100% 중앙대다. 여대 쪽은 여학생들조차 꺼린다. 옛날 생각해서 판단하면 낭패 본다.
2) 자연히 과외나 학원이 성행하지 않았다
80년대 중반까지는 과외니 학원이니 하는 게 이리 성하지 않았다.
과외는 아예 없다시피 했다. 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과외하는 아이가 있단 소리 자체를 들어보질 못했다.(참고로 나는 84년도에 고딩 졸업했다.)
학원은 중학교 때 성문영어 배우러 다닌 게 전부다. 그마저도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사라졌다.
대학 들어와서 몰래 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튼 지방에서는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다.
⇒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넌 누구 닮아서 공부를 그리 못하나’는 식의 얘기는 꺼내지 말 일이다. 이른바 ‘in seoul’을 하려면 전국 10% 안에 들어야 한다. 간혹 상담하다보면 ’한양대 아래‘(죄송)를 아예 개무시하는 경우를 보는데,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른다. 중앙대, 경희대, 외대, 시립대, 건국대 들만 해도 우리 때 연고대나 최소한 성균관대 급이란 걸 알아야 한다.
특히 지방대 의대 출신이면서 아이가 반에서 5등밖에 못한다고 푸념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 자기보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는데 말이다.
2. 청년 실업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
이렇게 진학이 분산됐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많았다는 걸 뜻한다.
상공계열 고등학교 출신자들 중 성적 우수자들은 은행이나 대기업 공장으로 쉽게 취직이 됐다. 실제로 내 아는 상고 출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력 은행에서 중견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자리 없어 취직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지방국립대 출신들도 서울로 상당히 많이 진출할 수 있었다. 교수 추천을 받으면 웬만한 곳은 다 들어갔다. 꼭 들어가고 싶은 데를 못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취업 자체가 막히진 않았다.
3. 등록금이 이렇게 비싸지 않았다
국립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립대라 하더라도 가계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소 팔아 자식 서울 보내는 부담을 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을 말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서울로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지도 않았지만.
교회 청소부 하던 우리 아버지도 무난히 애 셋 서울 유학 다 시켰다.
4. 당연히 독립이 쉬웠다
값싼 등록금에 자취방 값도 그리 비싸지 않아, 그리 어렵지 않게 독립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랬고 우리 동생들도 그랬지만, 2학년 때부터는 집에 손 벌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나 과외 같은 걸 해서 살았다.
5. 7,80년대의 왕성한 학생운동은 이런 물질적 조건에 힘입은 바 크다.
비록 쪼들리더라도 독립할 수 있고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도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먹고사는 것 아닌 가치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었던 거다. 어찌 됐든 80년대(70년대는 잘 모른다) 학번들은 운동하다가 구속, 수배되고 고문당하고 까딱하다가 죽는 것도 각오를 해야 했을지는 몰라도, 여하튼 운동할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워낙에 적이 뚜렷했던 점도 있지만, MB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게 그리 큰 조건은 아닌 듯).
지금 아이들은 이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아르바이트에 학점에 스펙에 취업시험 준비까지 몽땅 해결해야 하는 판국에 어디 딴 데 신경 쓸 여력이 있겠나. 더구나 살인적인 등록금은 애들을 몽땅 불효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래 사생결단으로 매달리는 거다. 사회과학 책 안 읽는 게 아니고, 못 읽는 거다.
그러니 함부로 ‘요즘 아이들은 정의감이 없다’는 식의 얘기를 꺼내지 말 일이다. 그건 말 그대로 언어폭력이다.
6. 과거 부모들은 극복대상이었다
우리네 부모 세대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고 ‘잘 살아보세’에 매진했다. 그러다보니 자식들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는 게 소원이었다. 앞뒤가 탕탕 막혀 있었다. 우리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박정희가 왕이었고 전두환은 당연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학 와서 일거에 물꼬가 터져나오니 그 강도가 엄청 셌다. 운동하겠다 하면 먼저 부모를 거스르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죄스러워 하면서도 사명감 같은 걸로 아버지 세대를 넘어섰다.
지금 젊은 세대는 넘어설 아버지가 없다. 말로는 다 데모 해봤고, 나름 민주적이라고 자부한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나도 다 안다’는 식이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식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극복 대상을 잃어버린다. 거기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당장 취업을 걱정해야 하니 부모들 얘긴 공염불에 가깝다. 실제로, 말로만 그렇지 실생활은 개판인 부모가 위선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부모 세대 입에서 나오는 ‘지당하신 말씀’이 어디 귀에나 들어오겠는가. 그냥 아이들 사는 대로 맡겨 놓는 것이 어쩌면 최상책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하는 얘기가 아이들 실상을 진짜로 모르면서 떠드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기라도 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