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에 대한 강의, 절대 듣지 말라고?

제 목
논술에 대한 강의, 절대 듣지 말라고?
작성일
2004-12-14
작성자

아래 글은 지난 2004년 12월 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 뒤에 제 생각을 붙였습니다.(제 글은 신문에 실리지 않은 글입니다.)

논술에 대한 강의, 절대 듣지 마라

이병렬/소설가·문학박사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 끝났고, 다시금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있는 것이 ‘논술’
이다. 논술 시험을 치르는 대학이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학과, 연·고대를 위시
하여 이른바 일류 대학들이어서 그만큼 수험생들의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편승하여 일선 입시학원에서는 대목이라도 만난 듯이 자신들의 논술 강좌
를 선전하여 학부모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강사의 사진까지 곁들인 광고들
은 그 강의를 듣지 않으면 대학에 못 간다고 협박하는 듯하다. 수강료는 적게는
십여만 원에서 많게는 개인지도라는 명목으로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것들은 광고일 뿐이다. 그것은 얄팍한 상술일 뿐이지 대부
분의 입시학원에서 하고 있는 것은 ‘논술공부’가 아니라 ‘논술에 대한 공부’
일 뿐이다.

대형 입시학원들에서는 수능시험 이후 논술강좌를 개설해서는 수십에서 수백 혹
은 수천 명의 학생을 모집한다. 50명에서 100명 혹은 그 이상의 학생들을 한 강
의실에 몰아넣고는 강사는 마이크를 들고 떠든다.

때로는 영화나 비디오 혹은 사진자료들을 보여준다. 철학, 문학, 역사, 과학 등
분야별로 권위자라는 사람들이 나와 해당 분야를 강의한다. 이름하여 배경 지식
을 길러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다고 배경지식이 늘어나겠는가. 수강료 받은 체면
치레는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학원에 잡아놓고는 글을 쓰라고 한다. 오랫동
안 학원에 잡아둬야 학부모로부터 받은 돈값을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써
서 제출한 학생의 글은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에 의해 빨간색 볼펜 몇 글자가 쓰여
진 뒤에 학생들에게 되돌아간다. 이름하여 첨삭해준다는 것이다. 말이 첨삭이지
수강료만으로는 양에 안 차니까 첨삭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자는 속셈일 뿐
이다.

유명한 수영 선수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수영 영법을 설명들은 경험이 있는가? 비
디오나 영화를 통해 올림픽 수영경기 대회를 보며 수영을 배웠는가? 수영에 관
한 권위자가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수영하는 법’ 강의를 듣고 수영을 배웠는
가?

전혀 아닐 것이다. 수영은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다. 수영은 강의를 통해서, 비디오를 통해서, 영화나 사진을 통해서 배우는 것
이 아니다.

논술이 바로 그렇다. 유명한 강사의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족집게라는 사람의
예상문제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논술문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백 명 모아
놓고 떠드는 논술 강의는 ‘논술에 대한 것’일 뿐 논술문을 쓰는 데는 별 도움
이 안 된다.

논술은 직접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신의 글에 논리와 체계를 잡아나가며 배우는
것이다. 물론 선배 혹은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이크 들고 강의하는
것을 듣고는 결코 논술문을 쓸 수가 없다. 진정한 논술 교육이 되려면 수강생이
10명을 넘어서는 곤란하다.

20명 혹은 30명이 넘는 수강생이라면 때로는 수백 명이 되는 수강생이라면 그것
은 논술 강의가 아니라 ‘논술에 대한 강의’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런 ‘논술
에 대한 강의’, 절대로 듣지 마라.

논술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권한다. 자신이 쓴 논술문을 들고 국어 선생님
을 찾아가라. ‘선생님, 이거 제가 쓴 논술문인데 평 좀 해 주세요.’ 아니면
‘첨삭 좀 해 주세요’라고 말하라. 직접 찾아와 논술 첨삭을 부탁하는 학생들
을 나 몰라라 하고 몰아낼 몹쓸 국어 교사는, 필자가 아는 한 없다.

비싼 돈 내고 학원으로 가 ‘논술에 대한 것’을 듣지 말고, 다니는 학교의 국
어 선생님을 찾아가 ‘논술’을 배우라.

————–
이 글에 대한 한효석의 생각..

12월 6일 ‘논술에 대한 강의. 절대로 듣지 마라’를 읽고

이병렬 씨 글은 논술글 형식으로 평가하면 서론과 결론은 있는데, 본론이 없는
글이다. 즉, ‘논술에 대한 강의를 절대 듣지 말라’는 것이 주장이고 결론이라
면, 그 강의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본론 근거로 삼아 구체적으로 논증해야 한
다.

그러나 그런 과정보다 지금 입시 학원과 논술 강사가 어떻게 학생들을 ‘협
박’하여 ‘얄팍한 상술’을 발휘하는지를 나열하였으며, 논술에 대한 강의를 듣지
않는 대안으로 국어 교사를 찾아가라고 조언하였을 뿐이다.

이병렬 씨 말대로라면 현직 국어 교사는 학생들이 쓴 글을 반드시 강평해주어
야 하며, 그 국어 교사는 ‘진정한 논술’을 가르쳐야 한다. 물론 비디오, 영화,
사진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수험생이 직접 쓰게 하되, 수험생 스스로 자신의 글
에 논리와 체계를 세울 때까지 ‘논술에 대한 강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때 히딩크도 선수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상대 선수의 장단점을 파
악하게 하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전략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런데도 이병
렬 씨는 그런 것 다 때려치우고 축구 선수를 무조건 운동장에 나가 뛰게 하라는
식이니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논술 초창기부터 공교육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교사에게 논술 지도법을 강의하였다. 그래서 이병렬 씨 글에 드러
난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학생들이 무작정 글쓰기를 연습을 하다보면 시험을 보기 전에 스스로 논
리와 체계를 세울 수 있는지? 논술 시험을 대학 입시 도구로 인정한다면 각 대학
이 논술 채점 기준에 따라 수험생 글을 평가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즉, 논술
은 기준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시험이므로, 글을 쓰기 전에 어떻게 글
을 쓸 것인지 그 기준을 알아야 그 기준에 맞추어 연습할 수 있다. 논술 관련 시
험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학생이 얼마나 연습해야 그것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좋겠다.

둘째, 논술을 국어 교사만 가르쳐야 하는지? 지난 2004년 2월 부산교육청이 주
관한 논술 연수에 국어 교사를 비롯하여 수학, 정보, 교련 교사 들이 참여한 것
을 어떻게 보는지? 현실적으로 모든 국어 교사가 철학, 문학, 역사, 과학 따위
에 정통하여 글에 담아야 할 모든 내용까지도 낱낱이 가르치지 못한다. 예를 들
어 인문계 논술 시험에 현재 우리 경제 상황을 제시하고 분배, 복지, 사회 정의
를 논하라고 출제하면 학생은 윤리, 사회, 철학 교사에게 배운 내용을 잘 다듬
되 국어 교사에게 배운 논증 구조에 담을 것이다. 논술은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이 가르쳐 궁극적으로 학생이 완성하는 것이지, 국어 교사가 모두 감당할 일은
아니다.

셋째, 국어 교사는 학생들 글을 반드시 강평하고 첨삭해 주어야 하는지? 논술
시험이 등장한 지 10년이 넘어도 아직 사범대학 교육 과정에 논술 과목이 없다.
그리고 논술은 고등학교에서 독립된 교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
느 교사든 시간을 쪼개 학생들 글을 봐주면 고마운 분이지, 첨삭해주지 않는다
고 나쁜 교사가 아니다. 오히려 논술을 잘 알지 못하는 교사가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더 큰 일이다. 자기 능력과 여건으로 치료하지 못할 환자를 붙들
고 있는 의사보다,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에 보내는 의사가 더 훌륭
하다.

넷째, 교육 수요자인 학부모와 학생이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어 우르르 몰려다닌
다고 보는지? 지금 공교육에서는 논술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어느 교과 교사
가 정규 시간에 논술을 가르치면 그 교사는 나라에서 정한 교육 과정을 어기는
것이다. 보충 시간을 이용하면 논술글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을 일러줄 수
있으나, 섬세하게 개별 지도하기는 어렵다. 학교에서 음악 시간을 운영해도 피아
노, 첼로는 따로 전문가에게 배우는 것처럼, 학생과 학부모는 사교육 논술 강사
를 여러 모로 따져보고 검증된 강좌를 선택한다.

말하자면 공교육에서 배운 것이 없는데 논술이 입시 도구로 쓰이고, 그 시험 비중이
크니까 학생들이 교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역량을 키운다. 그런데도 이병렬 씨는 일
부 사교육자가 불량하다고 모든 사교육자를 불량한 교사로 매도하고, 교육 수요자 수
준이 형편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다섯째, 학생 100명을 두고 마이크로 수업하면 안 되는 것인지? 예를 들어 각
대학이 출제 문제를 수시로 공개하고 출제 의도와 채점 기준을 대외에 발표하여
출제 문제와 채점 기준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그런 정보조차 공교육에서 수험생
들에게 전혀 일러 주지 않을 때, 논술 강사가 이런 문제를 그 대학에서는 이렇
게 채점한다니, 이런 식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그 대학에 가겠다는 학생들에게 마
이크를 잡고 일러줄 수 있다. 시험에 대비하려면 10명이 모여 할 연습도 있고,
1000명을 모아놓고 들려주어야할 것도 있다.

여섯째, 사교육자가 영화를 보여주고, 분야별 권위자가 배경 지식을 강의하고,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첨삭하는 것이 모두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짓인지? 글을
잘 쓸 수 있는 학생인데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글을 못 쓰고, 아는 것
이 없어 풍성하게 쓰지 못하는 것을 도와주려면 그런 여러 상황에 맞추어 다양
한 훈련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병렬 씨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목사
님이 수천 명 앞에서 이야기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어느 신앙인이 신앙
생활에 뒤늦게 참여한 사람을 거들어줄 때 강의하면 안 된다는 식이다.

지식인은 근거를 대고 이성적으로 비판해야지,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혀 불신을
부추기고 상대방을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구체적인 대안도 일러주지
않고, 국어 교사에게 모든 의무를 떠넘기면서, 함부로 ‘절대’를 강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 일부 불량한 강사를 빼고 대부분 논술 강사는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적 약자를 사랑해야 힘 있는 글, 개성이 담긴 글을 쓸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과정을 거치며 생각
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직업인으로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