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 주세요 -강혜원

제 목
이름을 불러 주세요 -강혜원
작성일
2001-05-28
작성자

이름 : 강혜원 ( ) 날짜 : 2001-05-28 오후 7:39:36 조회 : 198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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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3학년들은 김춘수 시인의 ‘꽃’을 배우고 있다. 이 시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게 해줄 만한 이야기를 만들던가, 자신의 체험을 써 보라고 했다. 전자과 3학년 어떤 아이의 글 한 구절. “선생님, 선생님은 말없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셨나요? 조용히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이런… 아이들 이름을 외느라 외웠다. 그런데 까불거나 활발한 아이, 조금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의 이름을 주로 불렀나보다. 3학년들은 그래도 컸다는 생각에 1, 2학년 아이들에게처럼 신경을 쓰지 못했다. 2학년 건설정보과는 가르쳤던 아이들이라 다 알고 있었고, 2학년 금속과는 적은 숫자 아이들인데다가 공부에 흥미가 적은 듯해서 더 열심히 애들 이름을 외고, 또 불렀다. 1학년은 세 시간인데다가 사진첩의 얼굴과 실제 얼굴에 큰 차이가 없어서 금방 외웠다.

그런데 3학년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외웠는가 하면 또 아리송한 아이가 몇 명 있는 게 아닌가? 얌전히 고개 숙이고 공부하는 아이들의 경우,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정말 내가 이름 한 번 안 불러 주었던가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소중히 여기는 것… 아, 나는 내 마음 속에서조차 아이들을 소외시켰나보다.

집에 오는 길 차창에 빗방울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보슬비였다. 그 보슬비는 거리의 등불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을 불러주어야지… 이름을 불리지 못한 아이들 마음 속에 자신도 느끼지 못한 아쉬움과 서글픔이 있을 지도 몰라. 정말 미안하다…빨리 다음 시간이 오길… 이름 부르지 못했던 아이들 이름을 불러야지…. 그렇게 마음 먹으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창밖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갔다. 차창의 와이퍼는 보슬비의 흔적을 지워내는데 말이다.

(강혜원, 서울 00공고 교사, 개인홈페이지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