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A 교장 – 공립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며 갑부된 사람

제 목
박A 교장 – 공립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며 갑부된 사람
작성일
2000-03-10
작성자

제가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78년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 근무하던 학교
는 중고교가 함께 있으면서 운동장을 같이 쓰고 교장 한 명이 두 학교를 책임지던 학
교였지요. 그러다 1979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로 갈라지고 중학교 책임자로 새 교장
이 부임하였는데, 이 사람이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으로서 여기서는 그냥 ‘박A 교장’이
라고 부를게요.

박A 교장은 교육계로서는 보기 드물게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정계에 동기 동창이 많았습니다. 1979년에서 1980년은 아시다시피 나라가 어수선할 때
였지요. 그 때 노 아무개가 총리였는데,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왔다고 했으니 알
만 하실 겁니다. 그런데 박A 교장은 그 좋은 학력, 좋은 머리를 이상한 데 써먹더군
요.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경기도교육위원회(지금은 경기도교육청)에
가서 예산 2천만 원을 끌어오더군요(그 당시 2천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1억 원 이상
이 될 겁니다). 그 돈을 은행에 저금하고 이자만 받아도 1년에 2백만 원은 되고 학생
들 20명한테 1년 장학금은 줄 수 있었지요. 그런데 박A 교장은 그 돈으로 꽃 장사를
시작했어요. 학교 한 구석에 비닐 하우스를 짓고 여기저기에서 꽃씨를 사다가 심어 꽃
을 키우는 겁니다. 관리하는 사람은 교감과 교사였고 학생들이 일꾼이었습니다. 자본
금 넉넉하지, 인건비 안 들어가지, 씨 한 봉지 뿌리면 꽃이 엄청나게 피지, 그야말로
학교 운동장을 파서 비닐 봉지에 담아 파는 흙장사나 다름없더군요. 돈 벌기가 땅 짚
고 헤엄치기였지요.

그런데 이 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총책임자였던 교감 선생님이 밤낮없이 일하다가
어느 일요일날 쓰러져 그 길로 돌아가셨어요. 그런 뒤에도 교사들과 학생들은 이 일
이 장학기금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믿고 계속 매달렸습니다. 교사들이 어떤 때는 새벽
6시에 나가 키운 꽃을 트럭에 하나 가득 실어 주고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학교
로 출근했지요. 그야말로 중노동을 했어요.

학생들은 수업을 빼먹고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공부하다가도 일거리가 있으면 나가서
일을 했어요. 체육 시간은 아예 작업하는 시간이었어요. 심지어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
다가도 시험지를 엎어 놓고, 트럭에 꽃을 한 차 실어주고 들어와 계속 시험을 봤습니
다.

이런 일이 계속되니 나중에 교사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학생들 원성도 점점 높아
지고, 지역 주민들도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경기도교육위원회에서
감사가 나온다고 연락이 왔지요. 그러자 갑자기 박A 교장이 장학생들을 추천하라는 겁
니다. 그래서 전교에서 31명을 뽑아 부랴부랴 2만 원씩 62만 원을 지급했어요. 그게
그 때 지급한 장학금 전부였습니다. 은행 이자만도 못했지요.

나머지 원금과 이익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몇 년 지난 뒤 그 때 같이 근무하던 어느
교사가 제게 고백하더군요. 나머지 돈은 교사들 고생이 컸다고 격려하는 뜻으로 대부
분 회식한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 그 때는 학교 교사들 도장을 어느 한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다가 보충수업비 같은 돈이 나올 때 수업계(또는 교무주임) 혼자서 도장을
다 찍어주었거든요.

그 도장으로 모든 교사들이 회식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 도장을 찍어주었답니다. 아
마 그 때 같이 근무하던 교사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를 겁니다. 애들 장학금으로 62
만 원을 주고, 교사들이 어느 요리집에 모여 몇백 만 원씩 음식 먹은 것으로 되어 있
다니,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도에서 내려온 감사반은 그냥 넘어가
더군요. 아시잖아요, 박A 교장이 국무총리랑 친구라나, 정계에 동창이 많다나, 뭐 다
그런 거지요.

그 뒤로는 안심하고 도둑질하대요. 나중에는 학교에서 키운 꽃으로 모자라니까 서울
서초동에 가서 학생들 장학 기금 조성한다고 싸게 사와서, 파는 데다가는 학교 장학
금 조성한다고 비싸게 팔았습니다. 학교에서 꽃을 많이 키울 필요도 없게 되었어요.
여기저기 중개만 해도 목돈이 떨어지니까요. 아, 이러니까 글쎄, 사립 학교로도 힘든
데 공립 학교 교장을 하면서도 금방 부자가 되더군요. 오죽하면 그 다음 해 박A 교장
이 옆 학교로 전근할 때 후임 교장이 인수를 안 하려고 했겠어요. 돈을 몇천만 원 들
였는데 장학기금을 조성하기는커녕 학교 빚이 몇백만 원이었으니까요.

박A 교장이 지금 뭘하고 지내냐고요? 재작년까지인가 공립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있
다가 정년 퇴직하였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옛날보다 더 부자가 되었답니다. 농고로 가
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그 학교에 18년짼가 교장으로 있었는데, 농고라는 데가 합법적
으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 다음은 읽는 분들이 상상하세요.

제가 그 때 그 비리를 알고 박A 교장을 ‘죽였으면(살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후
배 교사나 학생들이 박A 교장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
에서 고리를 끊어야 할 때 못 끊으면 그 후유증이 엄청나더군요. 이 글을 읽는 분들
도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을 되도록 피하지 마세요. 뒤에 올 다른 사람과 자손을 위해
서 말입니다.

저는 뒤늦게 81년 봄에 입대하였지요. 군대에 가서 많이 울었습니다. 아이들한테 못
할 짓을 많이 시켰구나 싶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교직도 싫었어요. 제대할 때 복직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배운 재주가 없어 다시 교사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는 그 때 생각하며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속세와 타협하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