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기 싫은 ‘전라도’ 이야기 -고종석
이름 : 고종석 ( ) 날짜 : 2002-03-04 오전 12:06:04 조회 : 250
제목 : 이문열씨의 반사회적 발언에 문단과 시민은 왜 침묵하는가 /고종석
정말 하기 싫은‘전라도’이야기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라는 기호가 함축하고 있는 문화적 뜻빛깔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것은 속됨, 천스러움, 가난, 배덕, 너절함 같은 이미지를 걸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특히 중년을 넘긴 영남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짙게 새겨져 있지만, 그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나 젊은 세대에게도 있다. 이런 함의가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나 술자리의 객담을 통해 종횡으로 퍼져왔기 때문이다. 주로 문화적 차원에 갇혀 있던 전라도의 이 부정적 함의는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정치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그 선거에서 박정희 캠프가 선도한 지역주의 공작은 한국사에서 정치적 지역주의의 현대적 기원으로 기록될 만하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한 강연회에서 책 반환운동을 펼친 화덕헌씨에 대해 ‘부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화씨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의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냐고 되풀이 캐물었다고 한다.”
고종석 (<한국일보> 편집위원)
전라도라는 기호의 부정적 뜻빛깔이 1971년을 기점으로 문화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비화했다는 것은 바로 그 시기부터 전라도라는 지역과 김대중이라는 개인이 몸을 합쳐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화적 층위의 전라도와 정치적 층위의 전라도는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문화 지형에서 매우 민감한 의미망을 구축해 왔다. 인격화한 전라도라고까지 할 만한 김대중씨가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도 전라도가 지닌 문화적 뜻빛깔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차원에서 이 기호는 새로운 부차적 시니피에(의미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다.
전라도에 들러붙어 있는 부정적 함의들을 논리적으로 격파하기는 쉽다. 그러나 편견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듯 전라도라는 기호를 구성하고 있는 부차적 의미 자질들도 논리 이전의 자발적 몽매 정서의 문제여서, 깔끔한 설명으로 그 그림자를 거두어내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히 나 같은 전라도 사람에게 더 어렵다. 듣는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서 보편적 이성보다는 전라도 사람의 방어 심리를 더 손쉽게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기분도 더럽기 짝이 없다.
내가 환기하려고 하는 것은 시민운동 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몰아쳤던 이문열씨와 거기 항의해 이문열씨의 책 반환운동을 펼쳤던 화덕헌이라는 이 사이에 있었던 어떤 장면이다. 화덕헌씨는 부산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37세의 남성이다. 벌써 석달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 다시 들추는 것이 궁상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이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켰기에 이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문열씨는 지난해 10월16일 부산의 한 강연회에서 “부산 사람들에게 일러바칠 것이 있다”며 화덕헌씨가 “부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화덕헌씨를 만난 자리에서는 화씨의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냐고 되풀이 캐물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실을 밝힌 것은 화씨다. 그리고 이씨와 화씨 사이의 대화는 두 사람만 아는 것이다. 이씨는 화씨가 밝힌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화씨의 말이 거짓이라면 이씨가 화씨에게 명예훼손죄를 물을 만하고 그 말이 참이라면 공개적으로 사과라도 할 수 있으련만, 그는 ‘대인(大人)’의 예로써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문열씨의 반사회적 발언에 문단과 시민은 왜 침묵하는가
사실, 이씨가 지난 십수년 동안 토해놓은 수많은 엽기적 언설들을 생각하면 그의 이 ‘전라도’ 발언에 놀랄 것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현대 문학> 2001년 10월)라는 문건이 드러내는 이씨의 사람됨은 그런 발언을 능히 예측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권자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구사하는 지역주의 선동에 견주면 별 것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언필칭 단일 민족 사회라는 한국에서 지역적 소수파에 대한 차별적 발언은 예컨대 유럽 같은 곳에서의 인종적 소수파에 대한 차별적 발언에 견줄 만한 것인데,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그런 발언이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는 지적도 한가한 소리일지 모르겠다.
나는 이문열씨에게 어떤 시민적 양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씨의 이런 반사회적 발언을 두고 문단을 포함한 시민 사회 일반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놀랍다. 이문열씨와 추미애 의원 사이의 다툼을 놓고 <조선일보> 지면에서 이문열씨를 거든 이청준씨께 묻는다. 문인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시민의 처지에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아니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고종석(<한국일보>편집위원)